김영진 교수. 화이트헤드학회장 [사진=더코리아저널]
[김영진 기고]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 예술과 전쟁
우리는 도구적 존재이다. 도구를 통해 인간은 다른 영장류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화되었다. 그 도구는 양면적이다. 그것은 우리를 살리기도 하지만, 파괴의 길로 접어들게도 한다. 가령, 돌도끼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자신을 파괴하는 양상도 있다. 근대 이후,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이것은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종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되었고, 앞으로 AI 와 같은 도구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서 스스로 작동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도구에 의해 인간이 지배받는 시대가 오고 있다.
도구는 유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형도 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상징체계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것은 무형의 도구이다. 상징체계에서 대표적인 것은 종교, 철학, 예술, 법, 관습 등이 있다. 이것은 과거의 유물이자 현재의 삶의 기준점이다. 가령,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종교적 상징체계를 수천 년간 지속해 왔으며, 그것은 풍요와 갈등의 교차점이다. 그래서 한번 상징체계의 루틴이 정해지면, 그것은 쉽게 바뀌지 않으며 오랫동안 존속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물질적 도구와는 달리 그 실용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정신적 도구의 공백상태는 결코 있을 수 없기에 세대를 거듭하면서 그 상징체계는 유지될 수밖에 없다. 가령, 고려 시대의 외교 정책이 중도 정책이었다면, 조선 시대의 외교 정책은 친명 정책이었다. 광해군은 외교를 중도 정책으로 변경하고자 했으나, 결국 친명이라는 루틴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대신들에 의해 파문을 당한다. 결국 조선은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여기서 쉬운 문제를 하나 제시해 보면, 도끼와 의자는 사물인가? 아닌가? 만약 여러분이 도끼와 의자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사고 방식은 뉴턴의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도끼나 의자를 맥락을 통한 관계항으로 본다면, 네트워크의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이다. 역동적인 네트워크의 세계관을 통해서 의자와 도끼를 본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상징체계 역시 하나의 네트워크로 본다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한편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오래된 정신적 도구는 철학이다. 그 철학 가운데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중국의 공자가 가장 대표적인 상징체계이다. 20세기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서양 철학은 플라톤이 제시한 주제를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문화 역시 한나라 시대에 동중서가 과거 시험을 유교만을 보겠다고 하면서 동아시아의 문명은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교의 상징 체계를 통해 존속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21세기에 와서도 우리는 두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플라톤의 사유방식이나 공자의 상징체계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시대는 아니다. 왜냐하면 토마스 쿤의 말처럼, 그 시대에 적합한 패러다임은 모든 인식 영역에서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현재는 농경 사회가 아니라 정보화 사회에 맞는 체계가 필요하다. 상징 체계 역시 한 번 폐기된 것은 다시 수용할 수는 없다. 상징 역시 물질의 도구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모험을 통해 거듭해서 변화해 온 것이다. 플라톤 체계 이후에, 근대 과학과 철학은 뉴턴을 중심으로 하는 패러다임을 수용했다. 그러나 21세기의 상징체계는 뉴턴의 패러다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인해서 새로운 상징체계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서양 문명을 지배해 온 상징 체계는 플라톤주의와 뉴턴주의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주의는 신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적인 수직적 체계를 완성했다. 이 체계는 중세까지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왕과 교황에 의해 지배되는 상징적 도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근대에 뉴턴의 상징 체계는 수직적인 질서를 수평적인 질서로 전환했다. 지상과 하늘은 하나의 체계로 구성되며, 더 이상 왕이나 교황이 지배하는 정치 체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지배를 하는 수평적인 패러다임을 구성하게 된다.
현재 대다수의 국가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적어도 국민이나 인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표방한다. 헌법에도 한국은 <민주 공화국>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수직적인 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인 질서를 통해서 정치적 행위가 결정되고 있다. 대다수의 국가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나 총리를 뽑는다는 수직적인 질서를 표방하는 플라톤과 공자의 상징 체계를 통해서는 현재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수평적인 상징 체계를 통해서만 사회 내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근대의 상징체계를 통해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현실을 고려해보자.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전쟁을 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동족에 해당할 수도 있고, 또한 동일한 지역에서 함께 공존해온 민족이다. 물론 갈등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과 논의가 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의하지 않겠다. 다만 철학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의 원인과 그 대안을 제시해볼 것이다.
우선,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한 집단의 독재적이고 호전적인 성향이 있어야 한다. 짐멜에 따르면, 전쟁은 강력하게 중앙 집중화된 집단 형태를 필요로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독재 체제를 보장한다. 전쟁을 하는 군대 조직은 가장 독재적이고 중앙 집중화된 체제이다. 왜냐하면 그런 효율성이 없다면 전쟁에 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근대 국가에서 전쟁의 대부분은 그런 중앙 집중화된 독재정치를 통해 가능했다. 서양 중세의 다양한 자치 형태인, 도시, 장원, 기사 간의 연합은 해체되고, 오직 국가만이 유일한 집단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대규모의 전쟁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근대 과학과 철학의 무의식적인 전제인 실체 철학에 기인한다.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 그 자신 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와 근대가 많이 달라진 상징체계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이런 실체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음은 명확하다. 근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정치 및 경제 체제 역시 실체 철학에 기원을 두고서 개체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우리는 ‘중앙’이나 ‘독재’라는 단어 속에서 기존의 상징 체계들, 즉 플라톤의 상징체계와 뉴턴의 상징체계가 그대로 지배받고 있다. 플라톤주의와 뉴턴주의의 공통점은 <실체(substace)> 개념을 전제로 패러다임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플라톤 철학은 중세까지 실체는 오로지 신에게만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나, 근대에는 국가와 개인에게까지 그 실체 개념은 확장된다.
이런 실체의 개념은 처음에는 개인에게만 주어지나, 차후에는 헤겔 철학에 의해서 국가와 민족에게 실체 개념이 제공된다. 국가는 이제 유일한 실체가 되며, 개인은 국가에 종속된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되면서, ‘중앙’, ‘독재’와 같은 실체 개념에 속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제 국가는 다른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개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제공받는다. 우리 역시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민족의 중흥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는 관념을 받아 들인 적이 있다. 이것 역시 헤겔의 실체 철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산업 현장에서나 정치 현장에서 민족과 국가의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상징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근대 국가의 건설은 바로 이런 실체 개념의 상징 체계가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중앙 집중화된 이 두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 집중적이고 독재화된 권력은 그 어떤 방식보다 강력한 폭력을 수행할 수 있다. 국가는 개인을 통제하기 위해서 <사법적 권력과 마법적 권력>을 이용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사법적 권력을 통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측면이 있다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마법적 권력의 독점을 통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측면이 있다. ‘중앙’과 ‘독재’에 해당하는 실체의 사유 방식은 타자를 배제하는 방식을 극복하기에는 쉽지 않다. 이와 같은 권력 장치는 보편적 법칙을 정해 놓고 행동하는 방식이기에 그런 법칙에 배제된 행동을 수행할 수는 없다. 따라서 독점적이고 중앙 집중화된 방식의 전쟁은 결코 끝이 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과 같은 네트워크 사회에서 전쟁은 당사자와 인접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아픔과 상실을 안겨다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가?
한편 칸트(Kant)는 인간의 판단을 <규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으로 나눈다. 규정적 판단은 사실과 윤리에 관한 판단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규칙을 통해서 구체적인 현상을 규정짓는 방식이다. 가령 수능 성적을 받게 되면, 우리는 그 성적에 맞춰서 대학을 정한다. 또한 도둑질은 나쁜 것이라는 규칙을 정해 놓으면, 그런 행동을 한 인물은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판단한다. 이와 같이 보편적 규칙을 정해 놓고 판단을 하는 것은 규정적 판단이다. 그러나 반성적 판단은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보편적인 법칙을 정하는 것이다. 가령 내가 BTS(방탄)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자. 그리고 전 세계의 젊은이들 중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우리는 방탄의 음악이 좋다는 보편성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반성적 판단이다. 이 판단은 미리 기준을 정해 놓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율적인 판단을 통해서 보편성을 탐구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미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반성적 판단을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행위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리프킨에 따르면, 21세기에는 더 이상 노동의 시대가 아니고 놀이의 시대라고 한다. 놀이의 시대는 더 이상 규정적 판단을 전제로 하는 시대가 아니라, 반성적 판단을 통해서 규칙을 생각하는 것이다. 즉, 노동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면, 놀이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특히 놀이는 실체처럼 혼자가 아니라 함께 규칙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놀이가 일종의 미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적인 활동을 위한 보여주는 상징 체계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앞에서 말한 뉴턴의 세계관이 아니라 네트워크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놀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뒤샹의 미술관에 변기를 설치하고, 그것을 <샘>이라고 규정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반성적 판단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화장실의 변기가 미술관의 공간에 연결되면서 새로운 형상을 부여받게 된다. 이것은 맥락에 따른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어린 시절에 우리는 이불 위에서 다양한 놀이의 규칙을 만든 경험과 같은 것이다. 미적인 행위인 놀이는 언제나 개인을 사물이 아니라 <전체 속의 일부>로 보게 하는 네트워크를 만든다. 우리는 함께 춤을 출 때, 개인이 아니라 전체 속의 일부가 됨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여전히 뉴턴의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개인의 살상을 하나의 사물로 보는 것이다. 그 개인이 모든 네트워크의 일부로 보지 않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환경 파괴가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는 없지만, 그것은 환경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목표지향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은 근대 계몽주의의 왕좌이며, 이것으로 엄청난 살상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일부만을 보는 방식임을 간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술과 종교는 사물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시각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이성을 보완하는 위치에 있다. 예컨대, 향유를 통해 폭력적인 갈등을 해소한 사례가 있었다. 짐멜에 따르면, 중앙 집중화를 거부하는 그린란드 에스키모는 어떤 형태의 추장제도도 없는 무정부 민족이며, 그들은 어떤 권위도 개인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 구성원들 사이에 분규가 일어난다면, 그 갈등의 유일한 해결책은 합창대회를 여는 것이다. 한 구성원이 누군가에 의해 피해를 보았다면, 그가 상대방을 향해 모방시를 작성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부족 집회를 소집하고 그 집회에서 그 시를 낭송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상대방도 같은 방식으로 화답한다. 이것은 갈등이 있더라도, 그 개인들은 부족 전체의 일원임을 염두에 둔 해결책이다. 결국, 갈등이 해소되고 나면 화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전쟁을 통해 해결책은 영원히 갈등이 해소될 수 없는 아픔만을 남길 것이다.
화이트헤드(Whitehead)의 말처럼, 우리 모두가 미적인 존재라고 가정해 보자. 현재와 같은 분산화된 네트워크 사회에서 거의 대다수가 인터넷과 휴대폰을 소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에스키모인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합창대회 수행하듯이, 현재의 갈등을 해소해보는 것은 어떤가? 물론 매우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때 신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시대도 있고, 또 한 때는 이성을 맹목적으로 믿었던 시대도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존재를 미적으로 보고 예술적인 행위를 통해 갈등을 대비로 전환하는 것은 어떤가?
니체의 말처럼, 망각이 최선의 치료제이기는 하나, 결코 타협이나 화해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수족을 상실하는 비극은 결코 화해가 불가능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갈등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 필요가 있다. 계속 싸우기만 하는 갈등은 결코 그 장벽이 붕괴되지 않는다. 여기서 기존의 상징체계를 통한 갈등을 통해서는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그 기억은 영원히 존속할 수 있다. 윤리와 종교의 규칙은 연역법과 같이 이미 보편적 법칙에 의해서 정해져 있기에, 그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예술은 함께 놀면서 그 규칙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은 쉽지 않으나, 아이들은 충분히 화해와 공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우리는 예술이라는 모험을 통해서 평화를 구축해 볼 수 있다. 평화란 결국 긍정적인 느낌을 수반하는 것이다. 긍정적 느낌을 위한 최고의 방법은 예술적 행위를 하는 것이다
내가 제시하는 대안은 다음과 같다.
첫 째는 갈등의 현장에서 함께 놀이의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특히 과거의 상징 체계에 덜 감염된 청소년들이 함께 축제를 벌이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의 축제가 있다면, 수 백 명의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도 함께 즐기는 것이다. 한 번은 이스라엘의 공간에서, 또 한 번은 팔레스타인의 공간에서 함께 즐기는 것이다. 전 세계인들 역시 인터넷을 통해 그 축제의 공간을 함께 즐기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유엔과 같은 공식적 기구를 통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인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어서 함께 보는 것이다. 어떤 아픔을 안고 있는지를 서로 간에 공감을 하는 것이다. 적대를 풀기 위해서는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적대는 공감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각자의 상처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함께 공감해 가는 것이다.
세 번째는 랩과 같은 음악을 통해서 서로의 갈등을 배틀로 풀어보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싸움이기는 하지만 신체의 폭력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서 대립이 대비로 전환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예술 작품을 상시적으로 전시해서 서로 간의 아픔을 직시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어떤 아픔을 안고 있는지를,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이 어떤 고통을 안고 살아왔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무기라는 도구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상징적 도구를 새로운 대비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예술은 사물이 아니라 맥락을 보게 함으로써 그들이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예술적 활동은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이 하나의 <결합체nexus>로 구성되게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지구인이다. 누구나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뉴턴의 세계관을 버리고, 환경, 집, 총, 인간을 역동적인 네트워크로 보는 세계관을 통해서만 현재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뒤죽박죽 철학: 김영진> 뒤죽박죽이란 모든 생명체가 아직 윤곽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만든 개념입니다. 죽은 것은 윤곽이 있지만, 살아 있는 것은 창발적이기에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뒤죽박죽을 저의 호와 같이 사용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