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교수, 화이트헤드학회장 [사진=더코리아저널]
[김영진 기고] <소크라테스 형과 챗GPT>
현대 사회는 빅데이터의 시대이다. 챗GPT는 검색에서 명령의 시대로 접어들게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임금처럼 명령을 내리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명쾌한 대답을 하는 충성스러운 신하를 곁에 두게 되었다. 절대적인 연역의 지식은 아니지만, 귀납을 통해 축적된 챗gpt의 지식은 우리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편리함을 통해서 우리는 ‘나와 너’의 관계보다는 ‘나와 그(그녀)’의 관계에 더욱더 초점을 둘 것이다.
가령, 챗gpt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는가? 혹은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거의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질문은 현재 미국의 대통령은 누구인가? 내년의 경제 동향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아주 쉽게 대답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임금과 같이 명령을 내리는 시대가 마냥 좋기만 할까?
사실 우리네 삶의 기쁨과 슬픔의 원천은 삼인칭의 관계가 아니라 일인칭과 이인칭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가령, <사자는 사슴을 먹는다> 이 명제는 맞는 것인가? 과학적 지식을 통해서 볼 때, 이 명제는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증과학의 시선이 아니라 미학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것은 틀릴 수도 있다. 이 사자가 병이 들고 이가 빠졌다면, 결코 그 사슴을 잡아먹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추상적인 삼인칭의 지시이다. 나는 어느 날 어느 시간에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네 삶은 일인칭과 이인칭의 관계를 통해 친구도, 사랑도, 가족도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일인가구’나 ‘고독사’가 일반화되었다. 과연 그런 분들이 정말 혼자일까? 아니면 다른 관계를 맺고 산 것은 아닐까? 물론 정말 인터넷도, 인간도, 동물하고도 관계를 맺지 못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무엇과도 접속을 통해 살아간다. 현대 사회는 인터넷에 의해 너무 과도하게 삼인칭의 관계를 맺고 산다. 그들 대다수는 ‘나와 그’의 관계 속에 살아간다. 그들 역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그 타인은 언제나 낯선 존재이다. 그것은 ‘나와 너’가 아니라 ‘나와 그’의 관계이다. ‘나와 너’의 관계가 익숙한 관계라면, ‘나와 그 혹은 그녀’의 관계는 낯선 관계이다. 익숙한 관계는 그것이 고양이나 강아지라고 할지라도 우리네 삶의 행복과 슬픔을 결정할 때가 있다.
심리학의 중요한 개념인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나 불행은 길들여진 관계에서 결정된다. 물론 삼인칭과의 관계 역시 일정한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이미 이인칭의 관계로 내 안에 들어올 때 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어린 시절에 동물들을 데려다 키우는 것을 좋아했는데, 국민학교 앞에 병아리를 파는 아주머니가 가끔 나타났다. 당시에 병아리를 키워보면 알지만, 며칠 못가서 대부분은 금방 죽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아주머니가 평소보다 조금 큰 병아리를 파셨다. 나는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용돈을 털어서 다시 한번 병아리를 키우는데 도전을 했다.
우리 집은 작아서 닭을 키울 공간이 없었기에, 작은 닭장을 집 앞 공터에 만들어서 매일 먹이를 주면서 키웠다. 내가 닭과 친해진 후에, 비보가 날라왔다. 나는 학교를 마치면, 시장에 가서 버린 배추 쪼가리를 모아서 먹이를 주었다. 근데 배추잎을 들고 닭장에 다가갔는데, 닭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혼비백산이었다. 어머니에게 물으니 냄새가 나서 다른 집에 주었다고 한다. 며칠 단식을 하면서 닭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황망하게 나의 친한 친구들은 내 곁을 떠나갔다. 나에게 ‘당신’와 같은 그 닭들은 다시는 볼 수 없었다.
한 해가 지나고 추석날에 차례를 지냈다. 차례상에 닭이 올라왔지만, 내가 키운 ‘그’ 닭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차례 후에 닭을 보면서 군침을 흘리며 닭다리를 집어서 입에 물려는 순간에, 어머니가 한 말씀 하셨다. 그 닭이 너가 키운 닭이라고! 나는 울면서 그 닭을 한 입도 먹지 못한 경험이 있다. 아마도 다들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닭을 먹지만, 나는 ‘그’ 닭을 먹을 수 없었다. 이때 닭은 삼인칭의 닭이 아니라 2인칭에 해당하는 당신이 되어서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삶은 이런 것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경험을 안고 살아간다.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그것을 ‘주름’이라고 한다. 각자는 자신과 누군가의 만남을 통해 주름을 형성한다. 이 주름이 쌓이면 소중한 추억이 생기고 차츰 그 추억이 삶의 자양분이 된다. ‘그’ 주름은 설사 어떤 지식이나 챗gpt가 아무리 분석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현대인은 삼인칭을 다루는 학문이나 지식을 통해서 타인을 과도하게 알아내려고 한다. 사실 한 개인의 삶의 주름은 다 펼쳐질 수도 없고, 다 알 수도 없다. 우리는 페이스북과 같은 것을 통해 엄청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지식의 증가와 기술의 발달이 많은 사람을 접촉하고 만나게 하지만, 우리는 역설적으로 ‘당신’의 관계는 점차적으로 사라지는 삶을 살고 있다.
현대인은 타인의 삶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며,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우리가 말하는 ‘너’는 삼인칭의 너이며, ‘나와 너’가 만나는 일인칭과 이인칭의 관계는 아니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챗gpt의 세상에 살면서 너무나 많은 정보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지만, 여전히 ‘나와 너’를 통한 만남에 의해서 발생하는 사건은 줄고 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의 유일한 사건이고, 그 사건의 주름은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저축계좌임을 잊고 산다.
나훈아가 말하듯이, 테스형, 세상은 왜 이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