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교수, 화이트 헤드 학회장 [사진=더코리아저널]


[김영진 뒤죽박죽] 우리는 섬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섬에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의 작가 대니얼 디포가 1719년에 발표한 소설 속의 주인공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모험이나 표류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하지만 이 책은 백인 우월주의와 함께 자연과 문명의 이분법이 숨겨져 있다. 이를 비판하기 위해서 미셸 투르니에가 <방드르디, 야생의 삶>을 통해서 <로빈슨 크루소>의 원작에서 백인과 흑인의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변형시키며, 문명이 야만보다 더 우월하다는 시선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 책의 중심은 인간이다. 대니얼 디포와 미셸 투르니에는 모두 인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지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디포와 투르니에게 간과한 것이 있다. 로빈슨 크루소와 방드르디가 생활한 곳이 섬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로빈슨 크루소와 방드르디, 및 섬을 모두 <사건 event>이라고 생각한다면, 전혀 다른 장면이 연출될 수 있다.

현대 철학은 <실체 철학>이 아니라 <과정 철학>이다. 과정 철학은 말 그대로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덧없이 흘러가며, 그것이 실재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서양인들이 수 천 년간 영원성을 추구하였다면, 동양인들은 흘러감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았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서양 철학 역시 동양 철학과 맞닿아 있는 곳에 있다.

자! 그렇다면 만물이 흘러간다고 해서 순식간에 변화하는 것은 아니고 그 변화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 대다수의 사물들은 일정 기간 존속하면서 변화한다. 우리는 그것을 <사건>이라고 한다. 원자, 전자, 차, 집, 아이, 어머니, 친구 등은 모두 일정한 시간 동안 존속하는 사건이다. 우리의 삶은 그런 사건들과 마주치면서 생활한다.

게다가 우리는 그 사건에 이름을 새긴다. 이름은 우리에게 최고의 추상적 선물이다. 만약 이름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런 이름 덕분에 그 대상이 나의 눈 앞에서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기억도 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돌아가신 부모님이 내 곁에 없더라도 형제들과 그 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는 일정 시간 머무는 사건과 이름이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덧없는 사건을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게 떠든 적이 있다.

나는 1988년에 강원도 철원에서 군생활을 했다. 88올림픽이 열린다고 해서 당시의 전방은 조금 긴장을 해서 군기가 상당히 세었다. 그 때는 고참(상병이상)이 아니고는 절대로 책을 읽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군에 가기 전에 글밥을 먹었던 경험이 있어서 너무나 글이 고팠다. 이등병 시절에 쓰레기 담당이었는데, 그 쓰레기에 신문쪼가리라도 있으면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마치 길고양이가 음식물 쓰레기 속에서 생선을 발견한 것처럼 헐레벌떡 글자를 삼켰다. 너무 맛이 좋았다. 와! 글자를 매일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꿈은 일병이 되고 나서 이루어졌다. 중대 불교 군종을 하던 고참이 전역을 하면서 새로운 중대 군종을 뽑게 되었다. 저녁에 푸세식 화장실에 앉아서 부처님의 미소와 같은 보름달 덕분에 반야심경을 다 외웠고, 나는 중대 군종이 되었다.

그 덕분에 매주 한 번씩 나는 중대 불교 법회를 맡게 되었다. 어느 날 무엇을 읽을지를 고민을 하다가, 이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순서대로 내 곁을 떠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으나, 재산, 친구, 자식, 부인의 순서로 내 곁을 떠나고 나는 내 몸과 함께 혼자서 무덤에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살면서 소중하게 생각한 것들이 먼저 내 곁을 떠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2살 먹은 젊은 군인이 무엇을 알고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죽을 때, 내 곁에 마지막까지 머무는 것은 내 몸이다. 부처님 말씀대로 소중한 것을 잘 모르고 살고 있다.

부처님 말씀을 빗대서 보면, 우리는 로빈스 크루소처럼 각자의 몸이라는 섬에 살고 있다. 여러분의 이름은 각자의 섬을 호칭하는 것이다. 섬에 산다는 말이 낯설게 들리지만, 그건 사실이다. 우리는 섬이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우선 자기 몸을 갖고 있으며, 태어나면 동사무소에 그 섬에 맞는 이름이 부여된다. 우리는 섬과 이름을 통해서 한국에서, 혹은 지구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가끔 사고가 나서 자의와 타의에 의해서 그 섬이 폭파되거나 사라질 때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바다 위에서 자신의 섬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살아간다. 먹고, 마시고, 자고, 운동하면서 각자의 섬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물론 자기 섬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뿐만 아니라 다양한 섬의 도움도 필요하다. 설사 그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내 섬에 들어올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타자와 무수한 관계를 맺지만, 그 외로움이 온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정보화사회에 걸맞는 엄청난 관계를 맺지만, 마치 로빈스 크루소의 무인도에 홀로 있음을 더 많이 느끼며 살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생성 및 과정 철학>을 실재로 본다면, 내가 흘러가는 섬이며, 내 주변의 모든 것도 흘러간다는 것이다. 흘러가는 바다 위에서 모든 섬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을 매일 매일 목격한다. 우리는 정보화 기술 덕분에 아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그 외로움은 더 심해져 가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반려동물도 키우고, 로봇과도 소통을 통해서 그 외로움을 줄여보고자 애를 쓴다. 일본에서는 나이가 든 분들이 외로움에 벗어나기 위해서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가는 경우도 자주 있다고 한다. 그것이 혼자 있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자기 섬에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관계를 맺고 산다고 하더라도, 내 몸과 다른 몸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섬은 결코 다른 섬과 합체될 수는 없는 것처럼, 몸과 몸은 합체될 수는 없는 것이다. 상주와 봉화에 살았던 할머니는 왜 자신과 우정을 나눈 분들에게 농약이 든 사이다나 커피를 마시게 했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비관계의 관계>를 의미한다.

사랑을 하는 것이나 우정을 나누는 것은 그 섬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섬은 파괴하거나 넘어가면 안된다. 사랑과 우정은 <비관계의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넘어갈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우정을 나누어야 한다.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최소한 그 상대방과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착각을 한다. 그(그녀)가 이제는 당신이 되었으니 무단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사랑과 우정은 어느 순간 깨어진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아내를 대할 때, ‘상경여빈 相敬如賓’(손님처럼 서로 공경해야 한다)함을 강조한다. 이것은 일정한 거리를 두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경쟁을 할 때는 그 섬을 돈을 주고 살 수도 있고 점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과 우정은 그렇게 해서는 얻을 수 없다. 그 섬을 지켜주고, 그 섬을 넘어가지 않는 선에서, 바다의 물결에 맞추어서 소통해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배움 다음으로 우정을 꼽는다.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이 말은 친구는 찾아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을 의미하는 신중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낙이며,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은 ‘원자’에 관한 연구이다. 물론 원자 내의 움직임은 입자와 파동이라는 두 가지 형식을 갖고 있다. 이것을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철수와 영희는 각자가 원자이며,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보자. 철수가 아무리 영희를 사랑한다고 해도, 영희를 파괴하면서 사랑해서는 안된다. 일정한 거리를 갖고 사랑을 해야 한다.

만약 한 명이 억압되거나 사라지면 사랑은 성립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관계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는 <비관계의 관계>라는 의미이다. 한국인들은 유독 '우리'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가령 올림픽에서 배드민턴으로 금메달을 딴 선수가 협회와 마찰이 있다. 협회는 중요한 관계를 맺는 조직이지만, 그 친구가 손상된다는 느낌을 가지면서 여러 가지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아주 소중한 ‘우리’라는 의미는 언제나 <개체는 차이를 통해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비관계의 관계>라는 역설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은 자신의 개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우리’를 생각하는 세대이다. 나의 군생활처럼 개성이 억압되는 생활을 할 수는 없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관계를 맺을 때, 그 사람의 개성을 파괴하지 않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신중한’ 방식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정과 사랑이 관계를 맺는 것이기는 하지만, 각자의 거리를 통해서 맺어야 한다. 현대 철학은 <관점>을 중요하게 본다. 관점은 일정한 거리를 통해서 볼 때마다 그것을 다양하게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연애할 때는 거리는 서로 간에 잘 유지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그 거리가 파괴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그로 인해서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비유적으로 우리 몸이 섬이라면, 다른 섬과 어떤 유대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섬은 다른 섬이 옆에 너무 가까이와도 너무 멀어도 소통이 어렵다. 그래서 소통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거리와 위치가 유지되어야 한다. 오늘날 데이트 폭력은 바로 그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의 섬이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을 때, 그 섬과 섬 사이에서 사랑과 우정을 나눌 수 있다.

오랜 옛날 조상들이 좋아한 책이 <주역>이다. 주역은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변수가 모여서 8괘가 된다. 8괘는 마치 섬과 같다. 그 섬들이 모여서 64괘라는 섬이 만들어진다. 조상들은 관계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며, 그 거리와 위치에 의해서 길흉화복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