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문화산책] 개성 박연폭포 vs 영동 박연폭포

이홍석 승인 2023.09.21 11:52 의견 0
이홍석 문화비평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홍석 문화산책] 개성 박연폭포 vs 영동 박연폭포>

개성(開城)의 옛 이름 송도(松都)엔 뛰어난 세 가지 자랑이 있었으니 박연폭포, 화담 서경덕 그리고 황진이다. 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부른다.

송도삼절 중 황진이는 학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당시(唐詩)를 즐길 정도로 시에 재능이 있었다.

일화로 세종의 서자 영해군의 손자로 거문고에 능했던 '이종숙'이란 왕족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황진이의 시에 남겨진 '벽계수'라는 인물이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히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화담 서경덕은 학자로서 큰 업적을 이루었는데 성리학으로부터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완성하여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던 인물이다.

성리학의 토대가 주리론(主理論)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인 데 반하여 화담은 세상의 구성을 본질태인 '이'와 현실태인 '기'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았으며 '기'가 '이'의 하위에 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현대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서화담은 성리학적 공리공론의 논리적 비약에 빠지지 않고 보다 현실적인 학문적 태도를 유지한 셈이다.

이는 훗날 서경덕의 주기론과 이황의 주리론을 더욱 조화롭게 발전시킨 이이의 학문적 완성을 통해 실사구시를 중요시하는 실학파의 씨앗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송도삼절의 박연폭포는 과연 황진이나 서경덕과 같은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개성관광사업이 한창인 2007~2008년 사이엔 인도를 중심으로 세계를 탐험하고 있어서 무려 11만 명가량이 보았다는 박연폭포를 직접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개성 박연폭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풍문으로만 들은 셈이다.

이렇게 완곡하게 말하는 것은 자연(自然)은 지식이 아니고 경험과 기억 그리고 감동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개성에 있는 박연폭포가 높이 37m에 박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박연폭포라 부른다거나, 박 진사라는 인물이 폭포의 용녀에게 반해서 집에 돌아오지 않자,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죽은 걸로 오해하고 비탄에 빠져 폭포에서 투신하여 죽었고 그 못을 ‘고모담(姑母潭)’이라 부른다는 이런 내용은 자판에 손가락 몇 번 두드리면 나무위키나 지식백과 따위에서 찾을 수 있는 내용이다. 별로 감동적이지도 않고 남녀 간 뻔한 설화도 지루하다.

그래서 송도삼절 중에 서경덕과 황진이, 이 절까지는 인정하겠으나 그 남은 하나인 개성의 박연폭포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겸재 정선이 그림으로 남긴 '박연폭포'는 그야말로 장엄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산천초목 온전하던 그 시절에 풍경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간혹 개성관광사업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동원되었던 11만 명의 관광객 중, 박연폭포를 배경으로 남긴 기념사진들을 어렵게 찾아보면 사실 정선이 그린 박연폭포의 모습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충북 영동에도 박연폭포라 불리는 높이 30여 미터의 폭포가 있다. 월이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이곳은 '옥계폭포'가 정식 명칭이지만 동시에 박연폭포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한국엔 역사를 통틀어 삼대 악성인 가야의 우륵, 고구려의 왕산악 그리고 조선의 박연을 꼽는다. 바로 그 주인공 중의 한 인물인 난계(蘭溪) 박연(1378~1458)이 이곳 영동에서 태어났고 그가 평소에 문인들과 자주 찾았던 장소가 옥계폭포이다.

박연이 옥계폭포에서 피리를 불면 아름다운 난꽃들이 피어났다 한다. 물론 그의 집에도 난꽃이 지천이었고 그의 호가 난계인 이유다.

문신이며 음악가이자 서예가였던 난계는 세종 때 집현전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악기를 개량하고 궁중 음악을 개혁하여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종묘제례악과 같은 한국 고유 음악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개성의 박연폭포 설화보다는 실존 인물과 연결된 영동의 박연폭포가 더 끌리는 이유다. 물론 폭포가 개성에 있든 영동에 있든 자연은 그 본질을 달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동의해도 존재의 형식에선 좀 더 가치 있는 서사가 유리하다.

남녀상열지사에 더 쉽게 관심을 두는 대중이 여전히 문화의 축을 이루고 있겠지만, 가십보다는 진지한 서사에 집중하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난계 박연은 위대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다. 조선 왕실에 일었던 피비린내 나는 권력 쟁탈전에 휘말린 그의 셋째 아들 계우(季愚)가 교형을 당하고 박연은 원로대신으로 그간의 업적을 빌어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파직되어 낙향하게 된다.

사건은 세종이 죽자 병약한 문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2년 4개월 만에 병사하고 어린 세자 단종이 겨우 12세의 나이에 즉위하게 되었다. 야심에 가득 찬 수양대군은 계유년에 난을 일으켜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 이때 난계 박연의 셋째 아들 '계우'도 단종의 측근으로 몰려 목숨을 잃게 된다.

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들에 의해 단종 복위 운동이 전개되려 하였으나 사전에 밀고되었고 모두 자결하거나 처형되었다.

박연은 아들을 잃고 낙향하여 덧없는 노후를 보내다 5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충북 영동 월이산 자락의 옥계폭포엔 한국의 삼대 악성 난계 박연의 위대하고 슬픈 사연들이 깃들어 있다.

세조(수양대군)가 난계 박연의 목숨을 계유정난(癸酉靖難)에서 직접 죽이지 않은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잃은 아비의 마음까지 살려둔 것은 아닐 것이다.

영동군에서 이처럼 유서 깊은 옥계폭포에 대한 통합적 관리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다. 정확한 지질학적 정보도 없고 높이도 20여 미터 또는 30여 미터 제각각으로 알려져 있다. 인근의 정자도 방치되어 나무 바닥이 썩고 터지고 들떠서 흉물스럽다.

소문난 공염불에 가까운 개성의 박연폭포보다는 영동의 박연폭포가 한민족에게 더 의미 깊은 곳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토록 홀대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폭포의 크기가 장대하진 않지만, 빼어난 절경에 가깝다. 풍화작용에 드러난 절벽도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고 이 시기에 수량도 풍부해서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의 낙차를 즐기기에 좋다.

아직은 찾는 이들도 많지 않아 물가에서 오전 내내 책을 읽었을 정도다. 이곳 폭포에도 풍속 설화가 있는데 옥계폭포는 자고로 음기가 강한 폭포란다. 폭포 아래에는 남성의 고환을 상징하는 듯한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것을 어느 날 치웠더니 마을의 남자들이 죽어 나갔다고 한다.

다시 제자리에 바위를 가져다 놓은 후로 마을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고환을 상징하는 바위엔 방문객들의 수많은 돌탑이 쌓여 있다.

왜 남의 고환에 정성스레 탑을 쌓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무엇에라도 빌어서 나라가 똑바로 설 수만 있다면 하는 소망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사진=이홍석]

[사진=이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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