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동서남북]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인생이란 '아웃풋'의 향연 그 자체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인풋'을 경험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웃풋을 예정하고 있다. 사실, 아웃풋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인풋에는 다소 아쉬운 데가 있고, 피다 만 꽃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인풋 그 자체를 무한히 즐길 수도 있겠지만, 삶이 더 의미있어지는 순간은 아웃풋의 단계로 들어설 때가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공부라는 것도 인풋의 즐김도 있지만, 공부가 의미있는 실현이 되는 건 아웃풋으로 이어질 때이다.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영원히 인풋으로만 공부하는 것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을 법하다. 교통체계란 이렇군, 운전은 이렇게 하는거군, 하고 끄덕끄덕하는 재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공부가 진짜 의미있게 실현되는 단계가 있다면, 도로에서 우리가 실제로 운전을 하며 그 체계 속으로 들어서는 아웃풋의 실행단계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독서의 즐거움도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글쓰기로 실현되는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 수많은 책들을 끊임없이 흡입하고 소비하는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 다음 단계는 그런 책들과 융화하고 호흡하며 자신의 흐름을 창출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책들과 함께 자기의 인생관, 또 세계관을 만들어나가고, 그것을 씀으로써 표출하는 아웃풋에 들어서는 일에는 확실히 더 '의미있는' 측면이 있다고 믿는다.
약간 지엽적인 이야기일 수 있는데, 수험공부라는 것도 무한한 주입식 암기에서 결코 끝나는 게 아니다. 핵심은 그것을 '잘 꺼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된 지식으로 문제를 풀고, 주관식을 써내고, 면접에서 말할 수 있는 아웃풋을 잘하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수험 공부를 할 때도 인풋과 아웃풋을 동시에 하려고 했다. 계속 나만의 정리 노트를 '만들면서(쓰면서)' 또 그렇게 내가 쓴 노트를 계속 '읽으면서(나에게 강의하듯 말하면서)' 공부를 했다.
새김은 들어옴과 나감의 중간지대에서 만들어지는 무엇이었다. 인풋만이 이어지면, 오히려 기억상실증에 걸린 느낌이 들었다. 들어오자마자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그 무언가가 나에게 실제로 '새겨져서' 내 것이 되는 과정은 인풋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새기는 행위' 자체는 인풋과 아웃풋의 동시성 가운데 일어나는 일에 가깝다. 읽은 것은 쓰거나 말하거나 읽은대로 살면서 내 것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아마도 삶 전반에 적용되는 일일 것이다. 흔히 아무리 인풋을 넣어줘도 전혀 변하지 않는 상태를 '소 귀에 경 읽기'라고 한다. 아무리 '경'에 담긴 말처럼 좋은 말을 들어도, 아무리 대단한 인풋이 있어도, 아웃풋으로 실현되지 않으면 소 귀에 경 읽기가 된다. 세상사 수많은 좋은 콘텐츠, 지식, 말, 경험 등이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행은 다녀오면 사진만 남고, 책은 읽고 나도 내용을 까먹고, 매일 수백 편씩 보는 쇼츠와 릴스는 며칠 지나면 사라진 시간 밖에 없다. 무엇이든 내가 내 삶에 새기고자 할 때, 그것은 진짜 삶이 된다.
결론은 글쓰기 예찬론이다. 여행이든, 경험이든, 대화든, 만남이든, 독서든 무엇이든 쓰면서 내 삶에 새긴다면, 그것이 실제로 내 삶의 유의미한 변화들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청년 시절부터, 나는 실제로 내가 좋은 것들에 영향 받아 좋은 삶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마음으로 간절하게 해왔던 글쓰기 인생 10년, 20년 쯤을 돌아보니, 그 매커니즘을 조금은 이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은 새김이고 아웃풋이고 실현이다. 삶을 나아가게 하는 건 아웃풋 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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