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문화산책] 측백나무 또는 흔히 사이프러스(Cypress)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나무는 식물학적 입장에서 살펴보면 사실 다양한 ‘과’와 ‘속’을 가지고 있는 한 식물군의 포괄적 이름이다.
고흐(Vincent van Gogh)의 그림으로 잘 알려진 측백나무는 편백나무와 함께 ’Cupressus‘라는 계통에 속해 있고, 삼나무 계통(Juniperus)의 품종과 소나무 계통(Picea Jezoensis)의 품종 등이 포괄적으로 사이프러스 나무로 불리고 있다.
고흐의 사이프러스(Cypresses)는 측백나무(Cupressus Sempervirens)로 키프로스(Cyprus) 섬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프러스는 고대 로마에서는 슬픔을 상징하는 나무였고 예수의 십자가로 쓰인 목재였으며, 고대 중국에선 관(coffin)을 만드는 주요 목재로 사용되었다.
제우스(Zeus)와 므네모시네(Mnemosyne, 티탄족 여신으로 '기억'을 관장)의 딸이며 운명의 몽둥이를 들고 있는 비극의 여신 멜포메네(Melpomene)의 왕관 또한 사이프러스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데 사이프러스 나무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이토록 비장한 물질인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케오스(Kea, Keos)섬에 태양의 신 아폴론(Apollon)이 사랑하는 소년 키파리소스(Cyparissus)가 금빛 뿔을 지닌 수사슴과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수사슴이 풀을 뜯다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소년이 활을 잘못 쏘아 자기가 아끼던 사슴을 죽게 했다.
키파리소스는 자신이 사랑하던 수사슴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따라 죽으려 했으나 아폴론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신에게 자신을 영원히 애통해하는 존재로 만들어 달라 간청하며 죽은 사슴 위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소년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며 팔다리가 푸른색으로 변했다. 흰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은 태양을 향해 뻣뻣하게 일어섰으며 소년은 그 자리에서 나무가 되고 말았는데 그것이 사이프러스 나무다. 아폴론은 끝내 이를 지켜보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사이프러스는 일 년 내내 상록이며 고통을 상징하는 침엽이며 태양을 향해 불타오르듯 물결치는 슬픔을 상징한다. 그 모든 것이 신의 은총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한낱 인간의 실수로 끝났음을 영원히 잊지 말라 한다.
*Cyparissus(1827), Sebastien Norblin
이란(Iran)의 야자드(Yazd)주에는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페르시안 사이프러스 한 그루가 있는데 무려 수령이 4,000년~4,500년으로 추정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이프러스 나무로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과 사이프러스 나무에 얽힌 짧은 일화도 있다. 나폴레옹 점령 기간 포병을 수송하기 위해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잇는 심플론 고개(Simplon Pass)에 도로를 건설했는데, 이때 예수 탄생 이전에 심어진 것으로 알려진 사이프러스 나무가 길을 막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가지 하나도 건들지 못 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무는 안타깝게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9월 2일 폭풍으로 쓰러져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신화에서 종교와 역사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받던 사이프러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술가들에게 유독 외면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예술에서 외면받던 사이프러스를 홀로 관찰하고 기록하며 독특하게 화면에 재구성하여 명작을 만들어 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에 썼다.
"난 밀밭이나 사이프러스 나무를 가까이 가서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외에 다른 아무런 생각도 없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항상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것을 소재로 '해바라기'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바라보다 보면 이제껏 그것을 다룬 그림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종종 미술 관련업 종사자나 미술을 좀 아는 체하는 이들이 곧잘 고흐의 이글거리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그의 정신 분열과 연결 지어 이야기하기 좋아하지만 어쩌면 그건 섣부른 이야기다. 고흐가 1889년 5월 생래미(Saint-Rémy-de-Provence)의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시절에 발견한 사이프러스와 그를 연결 지어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일차원적 발상이고 구체적 연구가 없는 퍼 나르기 소문에 불과하다.
그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다운 선과 균형을 가졌다고 말했다. 선과 균형이라는 벡터적 감각을 사이프러스 나무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현재에도 몇이나 될까? 분명히 고흐는 광기가 아닌 균형을 이야기했다.
*Wheat Field With Cypresses(1889), Vincent van Gogh
그가 사이프러스를 통해 그린 것은 죽음에 대한 광기가 아니었다. 그를 자살로 몰고 갔던 검증되지 않은 소문과 그 소문을 버젓이 미술대학에서 정답처럼 가르쳤던 교수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한 작가의 죽음을 드라마틱한 서사로 왜곡하였고 그에 남겨진 창작물이 상업적 물질로서 부를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었던 미술상이나 그에 동조했던 비평가들이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보다 의도적으로 사실을 외면하거나 그대로 잘못된 오류를 유통했다는 것은 사이프러스와 고흐를 둘러싼 기이함이다.
당시 마을의 철없는 소년들에 의해 저질러진 총기 사고로 안타깝게 고흐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 현재 밝혀진 견해다. 고흐는 끝내 그 아이들의 이름(마을에서는 누구나 아는 악동들)을 알리지 않은 채, ’숭고한 균형’을 선택했다. 사람들은 130년이 넘도록 진실을 왜곡하고 그를 정신질환자로 그리고 끝내 자살을 선택한 실패한 예술가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그의 불행한 서사를 또는 작품을 끝없이 칭송하며 뒤에서 돈을 세고 있던 셈이다.
사실 사이프러스는 그 신화적 기원과 각 문명에서의 쓰임처럼 '죽음이나 슬픔' 따위를 상징하고 있다. 고흐의 경우처럼 사람들이 특정한 사건을 강조하기에 딱 좋은 재료인 이유이다. 그러나 신화의 내면에 놓인 이것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죽음과 그 죽음보다 더 깊은 연민의 슬픔이다. 한낱 인간으로서 실수에 대한 반성이자 비극의 동행이며 표면적으로 드러난 죽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역설적 상징이다.
"예수를 누가 죽였는가? 그를 왜 사이프러스 나무에 매달았는가?" 이런 탐구적 질문을 바꾸어 보면 이렇다.
"고흐를 누가 죽였는가? 그를 왜 사이프러스 나무에 매달았는가?"
가혹하지만 설득력을 갖춘 죽음의 서사는 인류에 반복되고 신화는 현실에 소환되어 교활하게 쓰이기 쉽다.
하지만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자이다. 나는 종종 아무런 까닭도 없이 또는 어떠한 이유에 젊은 청춘의 슬픔을 마주했었다. 그것을 표현하거나 풀어낼 방법이 없었다. 나이 어리고 정신은 미숙하였다. 때로는 시대적 분노와 함께 얼룩진 슬픔의 크기에 압도되어 미래를 위한 씨앗 하나 심을 겨를이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괴테나 쇼펜하우어 또는 카뮈에서 허우적거리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고흐의 서사를 선택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의 사이프러스 나무들을 관찰하다가 내가 동요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때 감히 젊은 나는 벡터적 우주와 맞닿았고 균형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말하고 싶다. 모두가 시위에 나서던 혼란했던 그때 고흐와 사이프러스가 던져준 개인적 소요는 어떤 희망이었다. 균형을 갖춘 세상이 결국 올 거라는.
나는 뒤늦게 세례명 요한(John)을 받기 전까지 여권의 서명란에도 그리고 실제 나를 해외에서 소개할 때도 ’Vincent’라는 이름을 썼다. 한동안 고흐의 내러티브에 기생하며 시대적 혼란과 청춘의 슬픔을 정리해 냈다.
*Road with Cypress and Star(1890), Vincent van Gogh
예술의 힘은 지식과 지성에 기반하고(시지각 그 자체가 지성의 활동임을 주장한 철학적 견해로 보자면), 현상에 질문하며 실체의 구조를 이해하고 내가 존재자로 그것들 사이에서 기거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는 것에 있기도 하다.
고흐는 끝없이 그 과정을 탐구했다. 그를 단순히 열정과 광기로 이해하는 미술사적 태도는 낡았다. 인상주의의 경계에 국한하는 것 또한 분류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습성에 지나지 않는다. 내게 고흐의 사이프러스는 세상의 오벨리스크(Obelisk)이다. 벡터적으로도 경이로움 그 자체다. 현상이고 현상 너머에 있는 ’차연(差延)‘이며 케오스섬의 키파리소스가 원전이라면 그것을 압도하는 19세기의 해석이자 이미 21세기를 간파한 사유다.
지금도 나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볼 때마다 에너지의 중첩을 느낀다. 공간의 내부에서 밖으로 진동하는 파장과 공간의 내부로 우주의 어딘가에서 돌아오는 파장이 시지각을 넘어서는 벡터적 지각으로 되돌아온다.
대략 15년 전, 내가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작업 무대를 옮기자 처음엔 주변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있었다. 속되게 말하자면 부산에 예술이 뭐 할 일이 있겠냐는 식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동해남부선 철도와 함께 내가 활동하던 갤러리 뒤편엔 ’생래미와 고흐‘의 그것처럼 서늘한 자태로 서 있던 해운대의 사이프러스 나무들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예술을 어찌 성공이라는 부정확한 도박과 맞바꿀 수 있겠는가?
서울이 예술의 중심일 거라는 발상은 좁은 소견이겠다. 그렇게 치자면 파리가 있고 런던이 있으며 뉴욕이 있다. 예술은 인간 정신활동의 한 부분이고 예술이 인간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유한한 것인데 장소가 중요할 리 없다.
나는 혼란했던 시대와 청춘의 슬픔을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를 통해 안위하며 빚졌다. 고흐는 사이프러스의 죽음에 대한 상징을 오벨리스크의 균형으로 풀어냈다. 사이프러스 종류의 나무들이 사계절 내내 푸른 것은 죽음이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케오스(Keos)섬에서 벌어졌던 아폴론(Apollon)과 소년 키파리소스(Cyparissus)의 이야기에서 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남긴 심플론 고개의 사이프러스에서 그리고 고흐의 오벨리스크적 사이프러스에서 나는 그들이 삶과 죽음의 균형을 맞추라 말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가을이면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헐거워진 나무들 사이에서 그 존재감을 더욱 드러낸다. 고요하게 삶을 음미하며 사이프러스 나무들 사이를 산책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걷는 두 발에도 왼쪽 오른쪽 균형이 필요하다. 세상은 균형을 갖출 때 가장 아름답도록 설계된 작품이다.
저작권자 ⓒ 더코리아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