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주 문예만보] '김삿갓’을 다시 생각한다

이만주 승인 2023.10.07 07:33 | 최종 수정 2023.10.08 13:11 의견 0
이만주 문화평론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만주 문예만보] 방랑하던 김삿갓이 허기져, 어느 궁색해 보이는 민가에 음식을 청했다. 뜻밖에도 주인은 마다않고 상을 차려 내왔다. 그런데 너무 빈한한 나머지 끓였다는 죽이 멀겋다 못해 물처럼 묽었다. 김삿갓은 주인의 인심에 감격해 시(詩), 죽일기(粥一器, 죽 한 그릇)를 지어 보답했다. 이 ‘죽일기’는 장난끼가 많았던 김삿갓의 시들 중에서 깊은 휴매니티를 느끼게 하는 도타운 시다.

四脚松盤粥一器 (네 발 소나무 소반에 죽 한 그릇)

天光雲影共徘徊 (햇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떠도네)

主人莫道無顔色 (주인이시여, 무안해 하지 마오)

吾愛靑山到水來 (나는 멀건 죽에 거꾸로 비친 청산을 사랑한다오)

영월군에서 매년 김삿갓문화제가 열리며 문화제 중, '김삿갓문학상' 시상이 중요 행사 중 하나임을 처음 알았다. 2023년 제26회 김삿갓문화제의 ‘김삿갓문학상’ 본상 수상자는 올해 시집, <물의 시간이 온다(현대시학 기획시인선)>를 낸 김금용 시인이었다. 일단의 시인들이 축하 차 영월에 간다, 해서 나도 동참하기로 했다. 허나, 나로 하여금 영월에 가게 한 것은 새삼 오래 전의 김삿갓과 영월에 얽힌 어떤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겸사겸사 실로 수십 년 만에 영월행을 결행한 것이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영월까지 기차가 다님을 안 후, 남들과는 달리 기차로 가고 싶었다. 김삿갓문화제가 열리기 하루 전인 2023년 9월 21일, 청량리역에서 태백선 기차를 탔다. 2시간 30분이 걸려 영월에 닿았다(2시간 걸리는 기차도 있음). 단청을 입힌 한옥으로 지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역사(驛舍)가 단아했다.

자가 난고(蘭皐)이며 본명이 김병연인 김삿갓(金笠)과 영월의 관계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수십 년 전, 필자가 영월을 방문했던 것은 그곳에 김삿갓을 연구하는 ‘박영국’이라는 향토사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접한 때문이었다.

영월에 간 나는 박 선생을 만났다. 경찰 간부로 은퇴하여 여생을 김삿갓 연구에 바치고 있던 선생은 서울에서 모처럼 찾아간 젊은이를 반겨주었다. 그는 친절하고 인자한 분이었다. 김삿갓 시를 수집하여 등사해 만든 시집을 한 권 주셨고, 김삿갓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언저리를 안내해주셨다. 선생의 설명을 듣고 혼자 산길을 따라 김삿갓 집으로 여겨지는 곳까지 올라갔었다.

이번에 가보니 김삿갓이 묻혔을지도 모르겠다던 장소는 정식으로 봉분까지 돋우어져 완전히 김삿갓 무덤이 되어 있었다. 김삿갓 집도 초가로 잘 정비되어 김삿갓을 따르는 분이 살고 있었다.

박영국 선생을 찾으니 벌써 오래 전 일이라 영월 사람들조차 그의 존재를 잘 몰랐다. 길섶에 그의 공적비가 서 있어 다행이었다. 김삿갓문학관에 씌어 있는 한 설명문에서 그가 1994년에 작고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29년 전에 돌아가셨다. 내가 만났던 때 무척 건강하셨으니 내가 처음 영월에 갔던 것은 35년도 더 전의 일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인간으로서 해방된 삶을 살았던 김삿갓. 그런 삶을 어느 정도 따라할 수 있는 사람에게도, 삶에 끌려다니느라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김삿갓의 허허로운 삶은 하나의 로망이다.

그런데 이번 영월행에서도 그가 삿갓을 쓰고 방랑의 삶을 살게 된 연유, 그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를 지겹게 듣고 또 읽게 되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의 도움으로 모친과 형과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했다가 후에 다시 영월로 옮겨 숨어 살았다. 훗날 과거에 응시하여 할아버지 김익순을 꾸짖는 글로 장원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듣고 난 후,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스무 살 무렵부터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올랐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이 시점에서 김삿갓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한 그 판에 박힌 이야기를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1807년에 태어나 1863년에 죽은 김삿갓은 순조에서 철종 연간을 살았다. 역사를 전체적으로 들여다보자. 정조가 영명하고 훌륭한 군주였다고 하지만 그의 급서 후,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정조가 죽은 후 순조는 11세에 즉위했다. 나라가 안되려니 계속해서 어린 왕이 임금의 자리에 앉았다. 다시 순조가 죽은 후, 헌종은 8세에 즉위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정은 강화도령을 데려와 철종으로 앉혔다. 왕들이 어리고 몽매하니 대왕대비나 대비가 일정 기간 수렴청정을 했다. 그러다 보니 왕의 외척인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렸다. 자연히 탐관오리로 들끓었고 정치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삼정(三政)의 문란’, 즉 당시의 세제인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의 어거지 징수로 인한 폐해가 극심했다. 민생고는 극에 달했다.

순조 11년, 참다못한 백성들이 일으킨 첫 번째 민란이 ‘홍경래의 난’이다. 그때 차라리 홍경래의 난이 성공했더라면 나라의 형편은 더 나아지고 백성들은 더 편안하게 살게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썩어빠진 왕조에 충성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김삿갓의 할아버지가 조정을 버리고 홍경래에게 투항한 것이 위계질서를 떠받드는 성리학 사고체계 속에서는 역적질이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나무랄 일이 못 된다. 김삿갓이 죄인이라 생각하여 삿갓을 쓸 필요가 없었다. 양반 사회와 가진 자를 끊임없이 풍자했던 김삿갓의 시 세계는 오히려 ‘홍경래의 난’과 같은 민란의 저항 정신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옛일을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는 법. 어쨌든 홍경래의 난은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김삿갓의 절명시로 알려져 있는 “만사개유정 부생공자망(萬事皆有定 浮生空自忙: 세상만사 이미 다 정해져 있거늘, 뜬구름 같은 인생이 헛되이 스스로 바쁘다).” 지나친 운명론 같지만 나이 들어 돌아보니 그의 생각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떻든 김삿갓의 불행(不幸)이 빚은 시 세계가 후세인들에게는 즐거운 행(幸)이 되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간 낯선이에게 친절을 베푸셨던 박영국 선생. 나이의 간극을 떠나 김삿갓이라는 연결고리로 서로 마음이 통했던 선생. 오래전 일이고 생자필멸이지만 선생이 안 계셔 못내 서운했다. 김삿갓 무덤가를 거닐며 김삿갓과 박영국 선생의 명복을 빌었다.

9월 22일, 김삿갓문학상 시상식이 끝나고 김삿갓문학관 지근거리 숙소에서 수일 전 내린 비로 불어난 계곡 물소리를 벗하며 홀로 김삿갓 신세가 되려 했다. 그런데 그날의 축하객인 문인들이 술자리를 가지려 하니 모두가 머무르는 숙소로 함께 가자고 했다. 그도 좋을 것 같아 이미 숙박비를 지불한 숙소를 포기하고 ‘동강시스타리조트’로 옮겼다.

취흥에 겨운 문인들의 노래와 춤을 감상하는데 어느덧 시간이 자시(子時)를 넘겼다. 어찌하랴! 김삿갓 영월의 밤이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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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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