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주 문예만보] 소설가 구자명의 연작 장편, <건달바 지대평>

이만주 승인 2023.11.26 09:13 의견 0
이만주 문예평론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만주 문예만보] 서평 / Book Review 3... "존재의 의미와 삶의 방식에 대한 사유"

소설가 구자명의 연작 장편, <건달바 지대평> / 이만주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한번 주어진 생을 어떤 방식으로 영위할 것인가? 소설 <건달바 지대평>은 삶의 방식에 대한 사유이자 더 나아가서는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이다. 여기에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진다. 생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인가 아니면 운명 지어지는 것인가? 과연 시간이란 무엇인가? 나아가 ‘절대자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질문.

이와 같은 가장 근원적인 주제들을 ‘건달’이라는 한 삶의 유형, 즉 별 특징 없는 주인공 건달, ‘지대평’을 잣대로 설정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인과 평생 만나면서도 손 한 번 잡지 못하는 샌님이고 별다른 물욕이 없는 딸깍발이 같은 인물을 건달로 설정한 것이 의외롭다.

그 흔해 빠진 대학 졸업장도 없고 무직이면서 독신남으로 사는 주인공 지대평. 그러나 작은 집이 한 채 있다. 또 평생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최소한의 수입도 보장되어 있다. 특정한 직업이 없다지만 여러 가지 일도 곧잘 하고, 남의 아이도 잘 키운다. 건달 쳐놓고는 절제력도 있고 휴매니티도 있다. 그리고 건달이 된 것은 자신이 선택하기 전에 운명이 그를 건달로 몰고 간 면이 없지 않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지대평, 건달 맞아?” 하는 의문이 계속 든다.

하지만 어차피 작품에서 쓰인 말에 정의를 내리는 것은 작가의 주관이고 특정인물을 설정하는 것은 작가의 자유의지이다. 구자명은 생에 있어 별다른 욕심을 갖지 않으면서 남들은 시간에 얽매여 살 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시간을 초월한 삶을 사는 주인공을 건달로 보았다. ‘호모 타임리스(homo timeless)’ 즉 ‘나이야가라 맨(Niagara Man)’이라는 관점에서.(200쪽)

현대는 과거 필요한 물품을 필요한 양만큼 주문하고 그에 상응하는 생산을 하던 시대에서 돈을 벌려고 열 배, 백 배의 제품을 만들어 놓고 마케팅에 의해 판매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러니 환경은 파괴되고 지구는 몸살을 앓는다. “나는 생산하지 않는 대신 파괴도 하지 않는다. 건달은 평화주의적이며 보존주의적 차원에서 세상에 기여한다.”(55쪽) 세상에 건달들이 많다면 생산제일주의에서 비롯되는 비극의 악순환은 심히 줄어 들리라. 아마 전쟁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 작품은 단편소설로 첫 번째 이야기 <뿔>을 발표한 시기로부터 장편으로 만들어 이번에 세상에 내어놓기까지 25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만큼 작가에게 있어서는 이 저작이 중요한 작품이고 실제로 많은 공을 들였음이 느껴진다.

작품은 6개의 이야기, 각각의 소제목이 있는 건달1~건달6까지 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작가가 ‘연작 장편’이라고 밝혔듯이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면서도 30년 동안이라는 세월이 연관성을 갖고 전개된다. 그러면서 주인공을 계속 지대평이 맡기에 옴니버스 소설보다는 피카레스크식 소설에 가깝다. 작품에는 유형별로 나누어질 수 있는, 개성 있는 열서너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우리의 삶은 그 유형 중의 어느 하나이거나 생은 그리 간단치 않은 것이기에 여러 유형의 복합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작품은 처음부터 소설적 재미를 갖고 전개된다. “친구 대신 당사자인 것처럼 행세하며 박인실이라는 여인과 맞선을 보는 지대평. 하지만 의외에도 서로 통하는 바가 있어 몇 차에 걸친 술집 순례. 그리고는 남자 쪽이 떡이 되어 둘이 함께 들어간 여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윗옷들은 입고 있던 그대로인데 아랫도리만이 홀라당 벗겨져 있다. 그런데 여자와 엉킨 흔적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얼마나 섬찟하고 당황스러운 반전인가? 이런 추리소설과도 같은 기법이 여러 번 계속된다.

그 이후 박인실은 평생 내내 결혼을 포기한 채, 성녀(聖女)와도 같은 거룩한 삶을 산다. 간호사로 소록도에서 늙은 나환자들을 위한 봉사, 요양보호사로 무의탁노인 양로시설에서 근무, 사회복지사로 미혼모재활센터에서 미혼모들 돌보기 등.

성직자 사회에도 서로의 증오와 갈등이 있거늘, 타인들을 보살피는 헌신의 삶을 사는 무리 속이라 해서 인간관계에서 생겨나는 감정적 대립과 서로에 대한 증오와 원망들이 어찌 없겠는가? 하지만 인실은 자신의 참몫이라며 최선을 다해 나감으로서 문득문득 드는 회의감과 좌절을 극복한다. 그녀는 소외된 계층에 봉사하며 계속해서 헌신의 삶을 산다.

지대평에게 있어 박인실은 애틋한 첫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가 가지 못하는 거룩한 길을 가는 여성이다. 서로의 삶을 깊이 이해하면서 수년 만에 간간이 만나 인실이 도움을 청하는 일이 있으면 도와주는 좋은 관계를 지속해 나간다. 이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둘은 평생 옅은 스킨십 한번 없이 맑고 아름다운(?) 남녀관계를 지속해 나간다. 이런 성(性)이나 일체의 에로티시즘 배제는 작품 내내 유지된다. 지대평에게는 기껏 황하의 흙탕물 앞에서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친구의 미망인 혜윤을 품에 안아 부축한 것이 이성과의 스킨십 전부이다. 그만큼 작가는 이 작품에서만은 정결성을 유지하며 깊게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한 것 같다.

6편의 단편은 각각 시어와 같은 소제목을 달고 있다. ‘건달1 뿔’, ‘건달2 지도는 길을 모른다’, ‘건달3 강물은 흘러흘러 어디로 가나’, ‘건달4 무풍지대’, ‘건달5 요다의 지팡이’. ‘건달6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각 단편은 각기 다른 등장인물을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그러나 전반적으로 지대평이 화자 역할을 하면서 등장인물이 여기저기 겹치기도 한다.

지대평과 절친인 김천세는 누구보다도 지대평의 건달성을 이해해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이상하리만큼 복잡하게 살았다. 학교, 학회, 각종 사회단체 등 수많은 조직에 관여하는 한편, 연구, 저술, 강의, 발표, 토의로 너무나도 바쁘게 살았다. 그는 확실치 않은 이유로 40에 자살한다. 그의 부인 혜윤은 또 한 명의 김천세이지만 그의 남편보다는 생에 대한 융통성을 갖고 있다. 혜윤은 작품 내내 지대평의 좋은 벗이다. (건달1~건달3)

구석희는 교수의 논문을 대필해 주면서 교수가 되려다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한다. 어찌 보면 평범하고 한편으론 출세지향을 상징한다. 죽은 후, 시간강사들이나 자식들에게는 정확한 호칭인지 알 수 없는 ‘열사’로 불린다. 집안 형편상 학력이 고졸로 구청 세무공무원이었던 지대평의 아버지는 상납으로 승진하려 비자금을 만들려다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했다. 돈과 비리로 교수 자리를 얻는 일부 대학들과 공직 사회의 풍토. 하지만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어찌 공직 사회와 학교뿐이겠는가? (건달4)

김천세의 스승인 ‘허심당’의 ‘무하 선생’은 노장(老莊)사상을 전공한 사람으로 그가 쓴 책에 실려 있는 다음의 글이 그가 몰입되어 있는 정신세계를 알게 해준다. “현주(玄珠, 도道의 비유이기도 하고 진리를 상징하기도 함)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순수하고 풀잎 같은 여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도 만난 사람이 없고 홀로 짝사랑만 하다가 죽어 갔다.”(100쪽) 무하 선생은 그가 지향하는 바 그 자체가 ‘장자의 꿈’, 호접몽(胡蝶夢) 같은 사람이다. (건달2와 건달6)

본명이 남자 이름 같은 남명호는 생전에 주로 ‘호야 이모’로 불린 조산사이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봉사의 삶을 살았던 그녀는 박인실의 미래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줄줄이 딸만 낳던 집안에 네 번째로 태어난 그녀는 두 돌 지나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를 전다. 학교를 안 보내는 부모 몰래 형제들 어깨너머로 일본어를 독학한 후, 밀항하여 동경의 조산사학교를 나온다. 그녀는 왜관 낙산 이십 리 근방에서 알아주는 명산파였다. 그녀 손으로 탯줄을 잘라 준 동네 아이들 거개가 이모처럼 여겼기에 중년 이후 호칭이 ‘호야 이모’가 된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독실한 천주교 신앙을 갖고 성녀와도 같은 삶을 산, 호야 이모가 천수를 다하고 타계한 후, 박인실의 요청으로 그녀의 마지막 유물을 함께 정리하게 된 지대평은 그녀가 영적 독서를 기록한 두 권의 노트를 얻는다. 구약의 ‘욥기’를 가지런한 정자체로 쓴 필사록 밑에 반 페이지 남짓한 분량의 자해(自解)라고 표시된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하느님,~~저는 지금 당신이 심히 원망스럽나이다. 다시는 대면하고 싶지도 않나이다. 당신 말씀대로 어김없이 살아왔건만 제 마음에는 평화가 하나도 없나이다. 당신이 애초에 약속하신 땅은 어디에 있습니까.~~당신의 사랑은 그렇게 고통으로밖에 오지 못하는 것입니까?~~정녕 고통이 당신의 사랑입니까?~~하지만 지금 저는 당신의 땅으로 가는 그 기약 없는 길 위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지친 나그네일 뿐입니다.”(212, 213쪽)

죄가 있을 때는 죄를 징벌한다며, 죄가 없을 때는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신이 내리는 시련과 고통. 그 시련과 고통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논리. “하나님의 사랑이 컸기 때문에 요나의 시련도 계속되었다”와 같이 시련과 고통은 혹독할수록 인간의 영혼이 더 성숙된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함일까? (건달5)

마지막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에서는 ‘휴심암’의 노승, 시간의 궤적을 그린다는 화가, 양자역학을 가르치는 물리 선생이 모여 ‘시간’을 논한다. 하지만 결론이란 없다. “시간이란 있다, 없다” 등 여러 주장이 있을 뿐.

노장사상과 불교의 세계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휴심암의 노승 역시 일반 사회, 속세와는 동떨어진 사람이다. 그의 “0과 1 사이에는 있다, 없다가 아닌 공집합이란 무한의 장이란 게 가능하다”라는 주장을 들으면 깊고 고답한 논리처럼 느껴진다. 하긴 지금의 디지털문명이 2진법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 생각하면 그런 고답한 논리란 그저 관념의 유희일 뿐이다. 노승도 무하 선생과 마찬가지로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은 잊은 채, 뜬구름 잡는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야말로 지대평보다도 더한 진짜 건달들일지도 모른다. 노승 자신이 스스로 건달임을 암시한다. “헌데, 수행자나 건달이나 실은 별다를 게 없어요. 모두 진리의 향기 언저리에서 맴돌 뿐, 향기 자체와 동화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요.” (건달6)

김천세가 세상을 먼저 떠난 후, 지대평이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아들, ‘만수’는 어찌 보면 지대평의 도플갱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초월한다는 관점에서는 지대평보다도 한 수 위인 건달이다. 젊은이지만 생을 대하는 자세가 지대평보다 훨씬 더 여유롭다. 건달의 이상적인 상징이라고도 할 만수는 지대평에서 피어난 더 발전된 형태의 꽃이자 또 하나의 ‘구자명 표 건달’이다.

만수 부인인 선영이 생명을 잉태했다. 작가의 진정한 목소리가 표출된다. “그이들이 아무리 평생에 걸쳐 0과 1의 진리를 궁구하더라도 생명 하나가 없다가 있게 되는 존재의 실상을 만수네만큼 생생하게 보여 주진 못할 것 같다.”(258쪽) 찰리 채플린이 “생명이란 해파리에게조차 매우 아름답고 멋진 것이다”라고 했다 하거늘 우주에서 가장 신비한 존재인 인간 생명의 탄생만큼이야.

건달의 연원이라는 힌두교와 불교 신화의 건달바. 그는 향기만 먹고 노래를 부르며 살다가 제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는 존재지만 사실은 태아와 어린아이를 수호하는 천신이기도 하다. 지대평은 그 천신이 되기 위해 유아용품 가게가 있는 재래시장 골목으로 접어든다.

작품은 이제 이렇게 좋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반전인가? 휴대폰이 울린다. 휴대폰을 타고 들려오는 만수의 침통한 목소리.

“선영이가 병원엘 갔어요. 태아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요.”

작가가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세상사에는 이보다도 더 가혹한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가?

인간이 창조자를 기억하고 신앙 인격의 단련을 위해 주시는 고난이다. 욥기에 이르기를 “아무 이유 없이 고난에 직면하더라도 세상 모든 인간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조건 없이 무한 사랑해야 한단다.

건달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기에 읽기 전, 나름으로 막연히 화려한 건달의 출현을 기대했었다. 달을 보며 독작하며 불후의 시를 읊어대던 이태백 같은. 그런데 중국 시문학사에 높은 봉우리로 남은 그를 어디 건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여성 편력이 화려했던 카사노바를 얼핏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한 여인의 마음을 얻기도 어려운데 수많은 여자들을 마음대로 섭렵한 희대의 걸객을 건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그의 생애를 보면 능력도 많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한 화려했던 사람이다.

그렇다! 작가 구자명의 건달론이 소박한대로 들어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아마도 ‘구자명 표 건달’들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한 번 주어진 삶이다. 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선택이다. 그러나 생명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의 선택이 아니듯 삶도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지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달로 살겠다고 해서 건달로 살 수 있을까? 건달의 삶도 운명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작가가 작품 안, 소제목으로 사용한 ‘지도는 길을 모른다’, ‘강물은 흘러흘러 어디로 가나’는 지극히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의 길을 알 수 없고 우리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2023년 3월 6일 ‘도서출판 나무와숲’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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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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