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주 문예만보] 전남, 해남의 막걸리 예찬

이만주 승인 2023.12.18 13:45 의견 0
이만주 문예비평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만주 문예만보] <전남, 해남의 막걸리 예찬> / 이만주

“한국 사람의 멋을 알려면 먼저 한국 도깨비와 호랑이를 사귀어야 하고, 동방 군자 나라의 믿음을 살펴보려면 산신령님과 칠성님 곁으로 가야 하고, 한국예술의 정수를 맛보려면 무당과 기생과 막걸리 술맛을 알아야 한다.” 현대 들어, 민화를 발굴, 선양하신 조자용 님의 말씀이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 10위 안에 드는 국력을 갖게 된 데는 막걸리가 한몫을 담당했다고 생각한다. 조상 때부터 우리들의 아버지 연대 때까지 한국은 ‘농자천하지대본’을 받드는 농업국이었다. 농사가 지금 같이 기계화하기 전에는 논, 밭 농사를 두레 품앗이에 의존했다. 긴 세월 농사일을 할 때, 농주라 불린 막걸리는 요즘의 ‘커피 브레이크(coffee break)’ 대신 휴식의 노릇을,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연대를 잇는 역할을 했다.

그 전통은 우리나라가 공업국으로, 또 수출주도형 국가로 바뀐 다음에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1977년 한국이 최초로 수출 100억 불을 돌파할 당시, 회사에 막걸리를 갖다 놓고 축하잔치를 했던 일이 젊은 날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처럼 우리는 슬퍼도 기뻐도 막걸리를 마시면서 힘을 돋구었다.

나 자신도 그렇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많은 글을 막걸리의 힘으로 썼다. 글이 잘 안 써져 붓방아를 찔 때 막걸리 한, 두 잔 마시면 글이 술술 써질 때가 있었다. 물론 꼭 막걸리만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이나 서양권의 관광 문화 중에는 ‘와이너리 투어(winery tour)’라는 것이 있다. 포도나무 과수원 안 포도주 양조장에서 여러 종류의 와인을 조금씩 조금씩 마셔보는 관광이다. 한때 여행사와 항공사에서 근무하고 여행작가로 활동한 나는 호주, 남아프리카, 아르헨티나 등에서 적지 않은 와이너리 투어를 했다.

2022년 11월 땅끝에 있는 문학촌인 ‘토문재’에 있을 때였다. 남자 시나리오 작가 한 명, 여자 시인, 동화작가 각 한 명과 같이 입주해 있었다. 두 여자 문인은 외모도 아름다웠지만 마음씨도 고왔다. 네 명이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그래서 함께 해남의 그 유명한 해창막걸리 주조장엘 가보기로 했다(전라도에서는 양조장 대신 주조장이라는 이름을 많이 씀). 우리나라 막걸리 양조장이라는 게 대부분 볼품이 없는데 100년이 되었다는 해창막걸리 주조장에는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다. 그 정원에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는 탁자들이 놓여 있다. 찹쌀생막걸리 9, 12, 18도 짜리가 있는데, 12도 짜리를 구입해 시음했다. 해창막걸리의 황제 격인 18도 짜리는 출고가격이 11만 원인데 숙성 기간이 길어 출고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요즘 우리나라 이곳저곳에 많아진 일본식 술집 이자카야에서 사케를 마시려면 제일 저렴한 것이 한 병에 4~5만 원이다. 그런 사케를 마시며 “사케는 이리 고급스러운데 우리 막걸리는 왜 그리 싸구려”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막상, 요즘 새로 나온 막걸리 중에 값비싼 것을 마시려면 부담을 넘어 저항감이 든다.

하지만 이제 한국의 국격에 맞게 해창막걸리처럼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값이 비싼 고급 막걸리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실 해남에 있으면서 해남의 또 다른 막걸리인 ‘삼산막걸리’에 꽂혔다. 보통 막걸리 겉 표지(label)라는 게 ‘산지 지명과 이름과 함께 막걸리’라고만 글자로 써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해남에서 특이한 막걸리 라벨을 하나 발견했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라벨 안에 멀리 오래된 막걸리 주조장이 보인다. 겨울옷에 캡을 쓴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전거 뒤에 네 개의 큰 막걸리 통을 싣고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달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무언가 담겨 있는 스토리. 마치 어느 잔치집에 행복을 배달하러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결국 나는 이 라벨의 삼산막걸리와 조우하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해남의 또 다른 문학촌인 녹우당 근처, ‘백련재’에 있을 때였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두륜산 대흥사까지 자전거를 탔다. 대흥사에 거의 다다를 무렵 왼쪽에 삼산주조장(해남군 삼산면 고산로 583-1, 전화: 061-534-5507)을 발견했다. 반가웠다. 나는 주조장을 만난 김에 막걸리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자전거를 몰고 주조장 안으로 들어갔다. 해창주조장 같은 정원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막걸리를 마실 수 있게 야외 탁자들이 있었다.

나는 우연히 들어갔고, 청한 것도 아닌데 고두밥을 버무리던 주인인 H사장이 나와, 반갑게 맞아준다. 그래서 현장에서 나는 삼산막걸리들을 시음하게 되었다.

삼산주조장은 1950년, 1대라 할 수 있는 H사장의 조부모님이 해남군 송지면에서 시작했다. 1965년 2대라 할 수 있는 부모님이 물려받았고 1990년 현재의 삼산면으로 이전했다. H사장은 객지인 서울에서 보험회사에 28년 근무했다. 그런데 부친이 타계하신 다음, 모친 홀로 경영하시게 되자 그가 고향으로 내려와 2018년부터 3대째로 가업을 물려받은 것이다.

삼산 찹쌀 생막걸리 12도는 ‘남도 전통주 품평회’에서 2021년, 탁주 부분,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2022년, 찹쌀 생막걸리 9도가 최우수상을 탔다.

찹쌀과 멥쌀을 반반 넣어 지은 고두밥에 누룩만을 사용하여 일체의 감미료와 보존료를 첨가되지 않은 채, 한 달 동안 발효, 숙성시킨다. 그 후, 물의 양을 조절하여 각각 9도(750ml: 5,000원)와 12도 찹쌀막걸리(750ml: 7,500원)를 만든다. 나 같은 서민에겐 일반 막걸리보다는 도수가 높고 목 넘김이 좋으면서 시쳇말로 ‘가성비 짱’인 찹쌀막걸리 9도가 맘에 들었다.

멥쌀과 밀로 만든 6도 일반막걸리(750ml: 1,500원, 1700ml 3,000원)도 내 입에 맞았다. 특히 6도 막걸리에는 온갖 효능이 들어 있어 한방약재로도 쓰이는 내가 좋아하는 당귀를 집어넣어 더욱 호감이 갔다.

좋은 술을 빚으려면 우선 물이 좋아야 한다. 더불어 막걸리의 발효, 숙성에는 온도와 시간이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술 빚는 데에도 무엇보다 정성과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 3대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삼산막걸리. 그 3대인 H사장은 그가 손수 술을 빚는다. 그러니 술맛이 빼어날 수밖에.

시금털털한 막걸리의 맛을 알아야 한국인이다. 우리는 막걸리와 함께 살아간다. 시간이 없어 해남의 또다른 막걸리 양조장인 옥천주조장과 산이주조장을 방문치 못한 것이 아쉽다. 그래서 다음 해남행이 기다려진다.

[사진=이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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