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컬쳐인사이트] 역동하는 청룡의 해

이홍석 승인 2024.01.01 14:53 의견 0
이홍석 문화평론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홍석 컬쳐인사이트] 역동하는 청룡의 해

드디어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가 밝았다. 한반도에서 용은 구름과 비를 관장하는 상상의 존재로 과거 농경 사회를 대표하는 시대적 아이콘이었다. 그중에서도 청룡은 행운과 번영을 상징하며 백호(白虎), 주작(朱雀) 그리고 현무(玄武)와 더불어 사신(四神)의 하나로 동쪽을 수호하는 신이다.

대항해 시대를 이끈 유럽 사관의 관점에서 한반도는 동쪽에 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역시 한반도는 동쪽이다. 새해 첫날이면 사람들은 신성한 행위처럼 이 땅의 동쪽 끝으로 몰려가 동해에서 시작되는 일출을 바라보며 한 해 소원과 건강을 기원한다.

정말 동방을 수호하는 청룡이 있는 것처럼. 그러나 수 천 년을 지속해 온 사람들의 희망은 진실이며 실현 가능한 실재일 수 있다. 희망과 믿음은 그런 것이다.

청룡은 동쪽을 수호하며 동시에 사계절 중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봄을 관장한다. 이것은 왕의 덕목이다. 왕실의 장식에 청룡이 등장하는 것은 국가와 백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과거, 유럽인에게 동쪽은 미지의 세계이다. 그리고 역시 한반도에서 바라보는 동쪽 역시 미지의 불안함이다. 불안한 미지의 세계를 수호하던 청룡은 그래서 더없이 고귀한 상징이며 관념이다.

그러나 세계와 대한민국은 다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한 시대를 맞았다. 칸트의 주장에 따라 인간이 대상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 대상의 관념을 만들어 낸다면 그리고 천체가 아니라 지구가 회전하고 있는 것이 지금도 맞는다면, 21세기는 고정된 또 하나의 천동설처럼 움직이지 않는 현재의 오염된 가치로부터 대전환이 필요하다.

타자의 전쟁에 침묵하고 병든 민주주의를 그대로 방관하며 독재와 봉건이 다시 꿈틀거리는 기이하게 풍요로운 시대, 개인도 사회도 자본의 사익에 빠져 지금이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착각하는 사이에 다시 우리는 지구의 공전을 고민해야 하는 갈릴레이의 중세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어둡고 부조리한 시대였을 지라도 그것에 '역동(逆動)'하지 않은 문화와 예술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게 문화와 예술이 자본에 잠식되어 그 스스로 역동하지 않는 시대다. 이것은 지성의 몰락이고 수치다.

자본에 기반하고 번식한 21세기 예술의 기형을 흉내만 내는 한국의 문화와 예술은 사실 더 참혹하다. 구태여 정의하자면 현재의 한국 예술은 '조산(早産)과 미숙(未熟)'이라 할 것이다.

완성되지 못한 설익은 것들이 태어나고 자라야 할 것들이 자라지 못하는 괴랄한 예술이 자본에 도취해 '셀럽 현상'을 추종한다. 이제 갓 사회로 진출하려는 청년 예술가들에게 미래는 더는 정신의 역동이 아닌 자본의 추앙이다. 거대하게 상업화된 '자본 예술(Art Buried in Capital)'의 등장에 복종 아니면 패배다.

백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자들이 미술관을 차지하고 있거나 그들의 심각한 논문 표절 또한 이미 관행이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그들의 입맛에 맞춰 짬짜미로 앉힌 관장들과 그들이 사병처럼 거느린 무능한 학예사들이 만들어 내는 '조산과 미숙'은 한국 전체의 '탐미적 격동'을 무력화했다.

관념화된 자본과 그 자본의 또 다른 관념이 예술의 빛을 잃게 만들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었던 암흑의 시대처럼 예술이 마치 예술 그 자신의 중심처럼 고정되어 역동(逆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소멸해가는 행성과 다를 게 없다.

격동(激動)하고 역동(逆動)하라. 문화와 예술이 본래의 태도를 유지할 때, 사회는 항상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됐다.

3년에 걸친 팬데믹을 통해 유일하게 역동한 것은 비대면과 생성형 AI를 발전시킨 과학의 결과밖에 없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이 후퇴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타락하고 후퇴한 것은 예술이다.

인류의 역사에 예술의 굵직한 사조들은 당대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격동과 역동에서 태어났다. 탐구하지 않는 감각적 탐미가 낳은 기괴한 예술에서 이제 예술가들 스스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미술 시장의 컬렉터 등장은 대부분 허수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의 상수가 아니라 단지 변수일 뿐이다. 컬렉터 신드롬은 미술품 중계인들(관장, 아트디렉터, 큐레이터, 딜러 또는 허울 좋게 미술감독이라 불리는 그들)이 만들어 낸 허상이고 상술일 뿐이다. 실제 그들의 주장처럼 컬렉터 층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경제 전체 규모에서 본다면 존재하지 않는 수치로 봐도 무방하다.

또한, 미술의 조각 투자는 현행 자본시장법 따라 증권이 되기 어렵고 시장에 상장 불가능하다. 만일 로비를 통해 일부 규정을 바꿔서 받아들여진다고 하더라도 주식시장에서 미술의 가치는 작전에 따라 등장하고 사라지는 테마주 따위와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구매력 없는 그저 쇼일 뿐이다.

여기에 나는 한국 예술이 과감하게 격동하고 역동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예술가들의 삶이 비록 고난의 행군이어도 과장된 소문과 달리 존재하지 않는 미술 자본의 눈치 따위를 살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정작 예술계에서는 희망 회로만 돌릴 뿐,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사실이다. 복종하는 자들만이 자본가의 고물을 조금 얻어먹을 뿐이다. 자본은 냉정한 계산이다.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감각과 영적인 세계의 작가들은 상인들의 계산에 속기 쉽다. 그러니 자신들의 미래를 함부로 맡겨서는 안 된다.

2024년 신년 벽두에 나는 복을 기원하기보다는 각성을 주장한 셈이다. 이는 문화와 예술뿐만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전체에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행운에 기대는 미래보다 좀 더 선명한 미래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청룡은 존재한다. 관념도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희망도 실재하며 올바른 희망은 언제나 나은 결과를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희망을 포기할 때 더욱 그렇다.

역동하지 않는 사회는 관념에 지나지 않으며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회다. 미래는 현실의 모든 억압과 부조리로부터 튕겨 나올 때 다가온다. 시간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흘러서 다가오는 것은 미래가 아니다.

세계와 한국의 지성에게 바란다. 그리고 시민과 사회에 바란다. 격동하고 역동하라!

탐욕스러운 전쟁, 민주주의의 오염, 새로운 독재와 봉건의 형태, 자본의 만행과 가난한 인류, 팬데믹과 우주의 나이보다 더 빨리 늙어가는 지구의 환경에 침묵하지 않기를 바란다. 청룡의 해는 다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목성에서 발견된 갈릴레이의 별들이 길을 잃은 21세기의 인류에게 빛나기를 소원한다. 희망은 실재하는 것이니까.

[사진=이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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