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주 문예만보] 석인 여해룡(石人 呂海龍) 선생을 추모함

이만주 승인 2024.01.13 17:18 의견 0
이만주 문예평론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만주 문예만보] <석인 여해룡(石人 呂海龍) 선생을 추모함>

선생과 부담 없이 칼국수를 먹거나 막걸리를 마시는 것이 두 사람의 일상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의 하나였다. 바쁘다고 한번 거절한 것이 미안해, 내 쪽에서 “막걸리 한 잔 하시자”고 전화를 건 것이 지난 7월이었다.

허례허식이 필요 없는 사람들인데다 둘이 있을 때는 체면 차릴 것도 없으니 선생과 가는 술집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조금 여유가 있을 때는 종로 피맛골 지하에 있는 ‘소문난집(삼경원)’이라는 서민 주점이고 대부분은 낙원지하상가에 빼곡이 들어서 있는 목로주점이었다.

그날은 선생이 술값을 먼저 내셨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1주일 후에 석인 선생님이 잘 아시는 후배 K도 나오라고 해, 제가 술을 사겠습니다”라 말하고 헤어졌다.

그리고는 1주일 후 누군가가 “오늘이 선생의 발인날”이라고 연락을 해주어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놀라우면서 믿기지 않았다.

‘시신 기증’은 인간이 이 사회에 할 수 있는 마지막 기여라고 생각한다. 선생은 일찌감치 연세대 의대에 시신을 기증했기에 장례식이 없는 줄 알았다. 가까운 사람들과 선생이 가시던 인사동의 카페에서 추념식이라도 가지려고 하던 중, 장례식이 지인인 김중위 전 환경부장관, 독문학자 신차식 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잘 치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한강 이남에서 제일 오래된 사학인 동래고보를 나와 부산대 사학과와 연세대 대학원을 나온 석인은 1937년생으로 86세를 사셨으니 많은 일에 종사했고 일반인들이 모르는 업적도 많으시다. 젊었을 때는 부산 YMCA의 간사를 지냈고, 한국기독학생 운동을 이끌며 유신체제에 저항하다 붙잡혀 당시 중앙정보부 서울 남산분소에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때의 고문으로 손가락 하나가 망가졌다. 그후, 서울장신대와 부산의 대학에서 서양문화사를 강의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선생은 무엇보다 이 세상에 남긴 특별한 족적이 있다. 자신의 큰 키와는 크게 대비되는 작은 우표를 수집, 연구하는 우취(郵趣)의 최고 권위자였다. 나는 선생 덕에 ‘우표 수집 및 연구’를 의미하는 ‘Philately’라는 영어 단어를, 영국 왕실에는 우표 수집만 담당하는 벼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선생은 ‘축소된 예술품’이라는 세계 각국의 우표에 탐닉해 계셨다. 우리는 아무나 될 수 없는 전문 부문, 사계의 권위자를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는 2006년 나라 안에서 처음으로 우취 칼럼 책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그림>을 펴냈다. 그러다가 책이 절판되자 그 이후 쓴 우취 칼럼과 일반 칼럼들을 보태어 일종의 증보판인 <여해룡의 우표여행>이라는 책을 2011년 말에 다시 내셨다. 희귀한 책이고 우리나라에도 우취 인구가 꽤 있는지라 이 책은 교보문고에서 짧은 기간,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책의 서두에 실려 있는 김중위 장관의 추천사 일부를 옮겨 본다. (이 책은) “여(呂) 시인이 우표라는 배를 타고 ‘시대의 정신’을 찾아 역사의 강을 헤집고 다니면서 건져 올린 별 하나하나에 ‘시간의 매듭’을 풀고 지상에 풀어 놓아 재생시킨 인류의 역사요 문화다.” 그 말대로 책을 읽다 보면 선생의 박람강기에 18세기 프랑스 계몽시대 ‘백과전서파’를 떠올리면서 작은 우표 안에 인류의 온갖 역사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선생을 통해 만화 ‘고바우’를 그리던 김성환 화백이 개성 있는 우취가임을 알았고, 성서와 관련 있는 내용을 주제로 제작한 세계 각국의 우표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베네딕토 최익철 신부, 괴테 관련 우표에 관심을 갖는 또 다른 우취인인 괴테 전공 신차식 교수도 만나뵈었다. 나에게는 특이한 경험이었다.

석인은 1962년 부산의 국제신보로 등단한 시인이다. 그런데 55년 지난 2017년에야 첫 시집이자 마지막인 <들녘에 핀 노래>를 펴냈다. 하지만 한 권 시집이지만 깊은 서정의 세계를 담고 있고 좋은 시인임을 알게 한다. 특히 자신의 시 중, ‘강가에서’와 ‘옛 추억’을 ‘가고파’의 작곡자 김동진이 작곡해 가곡으로 남은 것을 긍지로 여겼다.

그는 의외에도 한글 사랑 실천가였다. 하나, 둘, 셋,---- 아흔여덟, 아흔아홉, 다음에는 ‘온’이라고 해야된다 했다. ‘천’은 즈믄, ‘만’은 골, ‘억’은 잘, ‘조’는 울이라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천'을 즈믄으로 많이 쓰게 된 것은 그의 주장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제, 그제가 있듯이 ‘내일’은 ‘하제’라는 것을 선생으로부터 들었다.

‘스크린 도어’는 ‘덧문’으로, ‘시청역 방향’이 아니라 ‘시청역 쪽’으로, ‘감사합니다’ 대신 ‘고맙습니다’를 써야 한다고, 도시철도공사에 등기우편으로 편지를 보내 일부 구간에서는 ‘감사합니다’ 대신 ‘고맙습니다’를 쓰게 하는 성과를 얻어내었다. 음식점에서도 ‘셀프’ 대신 우리말 ‘손수’를 써야 된다 하며 큰 종이에 직접 ‘손수’라고 써서 일부 음식점 정수기 옆에 붙여 놓곤 하셨다. 그렇지만 합리적인 생각으로 우리말로 굳어진 한자어나 필요한 외래어는 그대로 쓰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선생은 많은 유명인들과 교유했다. 문호라 할 수 있는 이병주 소설가를 한때 가까운 선배로 모셨기에 석인(石人)이라는 아호도 그로부터 지어 받았고, 그의 모든 것, 남들이 모르는 사생활까지를 꿰고 있었다. 또 그의 장례식 때 사회를 보았다고 한다. 구상 시인과도 깊은 친교가 있었던 모양으로 그를 인격적으로 문단의 선배로 존경했다. 가끔 구 시인과 있었던 옛일을 말씀하시곤 했다. 주점 ‘소문난집(삼경원)’에 김소월, 오상순, 박인환 등 다른 시인들의 초상이 걸려 있는 반면 구상 시인의 초상이 없자 “이건 경우가 아니다”며 어디선가 초상을 직접 가져와 거셨다.

석인은 크리스천이지만 책 서문에 서기 2011년을 병기치 않고 단기 4344년 만을 적을 정도로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도 강했고, 스님들과도 교유했으며 어느 정도 술도 좋아하셨다. 그래도 본인 생의 최고의 긍지로 기독교인임을 내세우던 것을 보면 일반인은 알 수 없는 깊은 경지의 크리스천이셨던 것 같다.

그는 큰 키임에도 스스로 관리하셨음인지 노년에도 구부정하지 않고, 꼿꼿했으며 멋도 있으셨다. 그러하니 젊었을 때는 더욱 멋있으셨을 것이다. 사람 좋아하며 좋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어진이였다. 나를 구상시인기념사업회와 연결시켜 주어 조금 더 생을 확장시켜 준 것도 선생이었다.

보헤미안 기질,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 그만큼 많은 지식과 관용하는 인격을 가진 이도 세상에는 많지 않다. 나는 수십 년 전 서울중앙우체국 앞에서 우연히 알게 된 이래, 십수 살이 더 위인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덧없는 시간, 그와 만나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선인(善人)과 어울렸다는 게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선생은 남들과는 달리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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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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