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동서남북] 인간은 해방될 수 없다
인간은 해방을 바라지만, 사실 해방될 수 없다는 게 인생의 진리가 아닐까 싶다. 기독교는 죄에서의 해방을, 불교는 욕망에서의 해방을 수천년간 노래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해방을 이야기했고, 요즘 사람들은 경제적 자유로 인한 노동에서의 해방을 외친다. 그 모든 '해방'에 대한 외침이, 사실은 삶에 대한 고통을 인정하기 너무 어렵다는 점을 반증한다.
그러나 인간은 해방될 수 없다. 살아가는 내내, 우리는 끝없는 스트레스 상황을 맞이한다. 하나가 끝나면, 다음이 온다. 어떤 부담과 책임을 벗어난 것 같으면, 다른 부담과 책임이 온다. 삶에서 견디고 참아야할 것이 영원히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자기의 몸 자체가 하나의 견뎌야 할 문제로 다가온다. 누구나 늙고 건강은 언젠가 무너진다.
어린 날에는, 나이가 들면 '해방'이 될 것만 같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자격증을 따고 나면, 취업을 하고 나면 말이다. 혹은 돈을 얼마쯤 모으면, 사회적 지위를 얼마쯤 얻게 되면 '해방'이 될 것만 같다. 그러나 삶에 해방은 없다. 우리는 삶을 계속 견뎌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작은 아씨들>에서 '작은 아씨들' 중 한 명인 베스라는 소녀가 앓아 눕게 되자, 온 가족들은 슬퍼한다. "그토록 단란했던 가정에 죽음의 그림자가 맴돌기 시작하자, 하루하루가 암담하기 짝이 없다." 그 때 자매 중 한 명인 메그는 한 가지 진실을 깨닫는다. 메그는 "자기가 그동안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살아왔는지를 실감했다. 사랑, 보호, 평화, 건강 등과 같은 인생의 진정한 축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그 어떤 사치품보다 훨씬 소중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인간이 추구해야할 것은 '해방'이 아니라 '실감'이다. 여기 이곳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도망감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것에 대한 실감이다. 삶에는 고통 뿐만 아니라 감사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실감해야만 하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가 곧 해방이라고 말하는 시대이지만, 우리는 거꾸로 가야할지도 모른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그 어떤 사치품보다 훨씬 소중한 것들에 대한 인정과 실감으로 말이다.
돌이켜 보면, 나도 평생 해방을 쫓아왔다. 대학교에만 가면, 작가가 되면, 로스쿨을 졸업하면, 변호사가 되면, 그렇게 계속 다음 단계로 가면 해방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그 다음 단계로 올 때마다, 오히려 부담과 책임과 걱정은 더 많아진 것 같기도 하다. 게임에서 레벨 업을 하면 지겨운 몬스터 사냥에서 해방될 것 같지만, 더 강한 보스몹이 기다리고 있다. 고 레벨이 되고 나면, 저 레벨이었을 때가 설렜고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전진을 멈추기는 어렵고, 멈추는 것이 꼭 최고의 행복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전진하면서도 알아야 할 것은 있다. 아무리 전진해도 영원한 해방은 없으리라는 것, 그런 해방은 적어도 이 삶이 아닌 죽음 뒤에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삶 속에 있는 한 견뎌야 한다. 그리고 견딤에도 '불구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견딤이라는 바위들 사이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줍듯, 행복을 주워야 하는 것이다. 행복은 거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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