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주 문예만보] 故 박내후(朴來厚) 화백의 그림 세계

이만주 승인 2024.03.25 12:09 의견 0
이만주 문예평론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만주 문예만보] 사랑이 깊었던 부부 교사.

예술에 대한 겸허함과 교사 생활에 충실하느라 홍대 미대를 나오고도 35년 간 미룬 개인전. 드디어 남편은 환갑을 맞아, 열게 되는 첫 개인전에 벅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날짜까지 잡아 놓은 첫 개인전을 앞두고 발견된 폐암. 남편은 전시회를 열지 못한 채, 애석하게도 타계합니다.

한동안 슬픔과 망연자실함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부인. 그러나 그녀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남편의 첫 개인전을 엽니다. 그리고는 그 후, 남겨놓은 수많은 작품들로 매해 거르지 않고 남편의 유작전을 1~2회 계속해 나갑니다. 이 시대의 순애보(殉愛譜)입니다.

<故 박내후(朴來厚) 화백의 그림 세계> / 이만주

예술가에 있어서 작품은 그 작가 자신이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박내후 화백의 그림들을 보면서 작가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선비처럼 맑고 올곧은 정신, 자기 화업에 대한 강인한 열정과 부단한 정진. 요즘의 화가들에게선 보기 힘든 시서화일체(詩書畵一體). 더하여 스스로 새긴 기품 있는 전각들.

십대에 화업에 뜻을 둔 이래, 타계하는 이순(耳順)까지 근 반세기의 세월이 녹아들어 있는 그의 수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새삼 마음이 경건해짐을 느꼈다. 그의 수묵화 내지 수묵담채화는 한국화 나아가 동양화의 전통을 올곧이 이어받은 채, 시서화각(詩書畵刻)에서 거의 사절(四絶)의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한국화에 있어 시도되었던 그만의 실험성은 또 다른 놀라움이었다.

한 그림에는 한쪽에 잎사귀와 열매들이 달려있는 박주가리의 줄기와 가지가 그려져 있고 명주실 같은 털이 달린 씨앗들이 공간을 부유한다. 또 어떤 그림에는 박주가리와 대나무가 함께 그려져 있다. 그림에서 고요한 자유와 평화가 느껴져 힐링 효과를 준다.

“可使食無肉가사식무육/밥에 고기 없는 건 괜찮아도, 不可使居無竹불가사거무죽/사는 곳에 대나무가 없어서는 안 된다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소동파(소식蘇軾)의 시를 화제(畫題)로 써놓고 수묵으로 대나무들을 그렸다. “蓮花之君子者也연화지군자자야/연꽃은 군자 같은 꽃이라네”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주돈이(周敦頤)의 애연설(愛蓮說)을 화제로 써 놓고는 담채로 연꽃을 그렸다.

그는 박주가리, 대나무, 연꽃 이외에도 난(蘭), 패랭이꽃, 상사화, 등꽃, 나팔꽃, 민들레, 소나무, 버드나무와 같이 주로 꽃과 나무를 즐겨 그렸다. 풍경을 그려도 거의가 나무가 있는 경관이다. 그는 동물보다는 평화스러운 초목, 화훼를 더 좋아한 것이다.

그는 방현재(芳峴齋)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다. 1986년 그가 반한 마을 어귀에 있는 수령 200년 된 왕버드나무가 마음에 들어 찾아든 한옥 고옥이 있는 마을의 이름이 “고개 너머 꽃 피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아산시 염치읍 방현리. 그는 삶의 터전이 되고, 아뜰리에가 된 집의 이름을 ‘방현재’라 이름 짓고 그의 당호로 사용했다.

박내후는 그곳 방현재 뜨락에서 20년 세월 동안 등꽃, 나팔꽃, 패랭이꽃, 박주가리, 민들레, 상사화, 소나무, 대나무, 청단풍, 매화나무, 자두나무, 은행나무 등을 키우고 가꿨다. 더불어 100여 분의 동양란과 30여 분의 분재도 정성껏 가꾸었다. 자연보다 더 뛰어난 예술가가 어디 있는가? 이후, 마을 어귀 우람한 왕버드나무와 그가 가꾼 꽃과 나무들이 그의 작품 소재가 된 것이다. 그는 밖으로는 자연을 스승으로 삼고, 안으로는 마음에서 근원을 얻었다(外師造化 內得心源). 또한 꽃과 나무를 기르고 가꾸는 자체가 수양과 구도(求道)의 과정이었다. 그의 작품들에서 경건함을 느끼는 것은 그 속에 그런 구도의 과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존재하고 그 자신이 동경하던 이상향인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의 이름을 빌려 세월당(洗月堂)이라는 당호도 사용했다. ‘洗月’은 맑은 물에 달을 씻는다는 뜻이다. 그의 그림들은 씻은 달 만큼이나 맑고 아취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도 그리는 대상에 따라 채색을 가하는 수류부채(隨類賦彩)의 법을 따랐다. 하지만 그의 작품의 기조는 수묵화 내지 수묵담채화다. 채색화도 그렇지만 수묵화야말로 동양적인 미학과 우주관에 상통한다.

수묵화가들은 물과 먹에 대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수묵화에는 먹이 검은색 한 색이 아니라 오색(五色), 오채(五彩)로 간주되고 쓰인다는 오묘함이 있다. 즉 먹의 농담에 의해 모든 색채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얘기다. 수묵화는 거추장스러운 세부사항을 배제하고 절제된 단순한 선과 색조에 의해 밝기와 어두움, 빛과 그림자로 입체감, 공간감을 살려 사물과 산천경개, 깊은 정신세계와 나아가 우주의 조화로움과 균형을 표현한다.

박내후는 그의 힘찬 등나무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연한 붓으로 필력에 의지해 윤곽선 없이 일필휘지로 선이 끊어지지 않게 그려 움직임과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몰골법, 어떤 때는 옛부터의 수묵화 그리는 방식인 필선을 동반하는 파묵법(破墨法), 또 어떤 때는 지극히 단순화해서 그가 그린 호랑이 그림에서와 같이 물과 먹물이 스며드며, 번지며 이루는 형태에 의해 사물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발묵법(潑墨法) 등 다양한 기법으로 다양한 대상을 그렸다.

나는 나중에야 그의 색다른 그림들을 보고 놀랐다. 풍경을 그릴 때 담백하게 그리는 수묵산수화와 달리 예상외로 그는 산수화를 그릴 때 채색을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다른 그림들과는 다르게 상상력을 발휘하여 발묵의 효과를 십분 활용하여 마치 ‘비류직하삼천척’을 연상하게 과장해서 그린 폭포 그림들도 있었다. 그런 그림들은 현대 서양회화의 색면화나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켰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수렵도를 극히 단순화하여 표현하면서도 쫓기는 짐승과 말을 탄 무사가 산과 산을 뛰어넘는 호방한 그림은 원색을 써 거의 색채화에 가까웠다. 한국화라고 하기에는 파격적인 문자 추상 같은 그림들. 원숭이들의 군무 같은 익살스러운 그림들. 초록색 굵은 선으로 몰골법을 사용해 산을 표현한 그림. 벌거벗은 많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목판화. 보름달 아래 비각 같은 것이 서 있고 멀리 송전탑이 보이는 한국화로서는 거의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소재의 그림.

박내후는 한국화에 있어서 그 나름의 실험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이순에 타계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또 다른 더 많은 실험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요즘의 한국화가들은 한문을 모르고 서예도 약하다. 옛날에는 있을 수 없었던 일. 동양 화단에선 시서화일체다. 어느 하나 모자라면 화가로서 인정되지 않는다. 화업의 초기, 스스로 서예가 약한 것을 알았던 그는 절치부심, 끊임없는 노력과 정진을 거듭했다. 드디어 그는 서예에도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주로 단아한 해서를 썼다. 하지만 예술가의 자유분방함 때문인지 약간의 행서 느낌이 나는 해서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서예가들도 힘들어 하는 초서도 썼다. 조선 중기 신사임당이 당시(唐詩) 오언절구 여섯 수를 초서로 쓴 것을 임서한 작품을 남겼다. 사람에 따라서는 초서가 아니라 행서에 가까운 행초(行草)라고도 하지만 그의 실력이 서예에도 출중했던 사임당의 초서를 따라 쓸 경지에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글은 예서풍으로 쓴 것이 흥미롭다.

동양화단에선 화가는 시서화일체 이외에 전각에도 그 스스로가 능해야 하고 낙관하는 자체가 또 하나의 예술이다. 작품이 완성된 후, 끝났음을 의미로 전각, 즉 인장을 찍는 행위가 낙관이다. 그 인장, 우리가 쉽게 말해 도장은 오랜 옛날부터 전서로 새기는 것이 관례였기에 그 인장을 새기는 행위와 또는 그 인장 자체를 전각이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인장이 전서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박내후는 50인(印)의 인장, 즉 전각을 남겨 놓았다. 말미에 낙관할 ‘芳峴齋’라는 호와 ‘朴來厚’라는 성명의 인장은 전통을 따라 대부분 전서로 새겼다. 양각한 주문방인(朱文方印, 글자가 붉은색으로 찍히는 네모난 도장)들과 주문방인보다 오히려 더 많은 전서로 음각한 백문방인(白文方印, 배경이 붉고 글자가 하얗게 보이는 네모난 도장)들, 그리고 예서풍에 가까운 한글 인장들, 작품의 균형미와 조화미에 일조하기 위해 오른쪽 위에 찍는 두인(頭印), 옆에 찍는 측인(側印)들에는 글자로 된 도형, 아이들, 거북이, 나비, 하트를 나타내는 기하학적 도형, 부처님, 말탄 기사의 그림, 산양 비슷한 짐승 등을 양각, 음각으로 다양하게 새겨 놓았다.

나는 박내후의 인장들을 보면서 전율했다. 그는 한국과 중국 화가, 서예가들의 옛부터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고 그 이외에 인장 조형의 창의성(장법, 章法)과 한국화가로서의 주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49년에 태어나 1971년 홍익대학교 한국화과(당시는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35년이란 세월을 교직에 몸담으며 꾸준히 작품을 그렸다. 하지만 세상에 내놓지 않은 채, 환갑에 딱 한번 개인전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2008년 9월 22일로 계획된 전시회를 위해 마지막 낙관을 찍은 후 발병이 되었다. 애석하게도 2009년 1월 25일, 그는 타계했다. 따라서 환갑맞이 전시회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전략-

誰知荒草野 수지황초야 / 누가 알리, 거친 들풀 숲에

亦有好花叢 역유호화총 / 이런 좋은 꽃떨기 있는 줄을

色透村塘月 색투촌당월 / 꽃 생김은 연못 속 달보다 아름답고

香傳娘樹風 향전낭수풍 / 언덕나무 바람결에 풍기는 향기

-후략-

위는, 그가 바위 섶에 핀 패랭이꽃들을 그려 놓은 그림 속에 화제로 써놓은 고려시대 충신 정습명(鄭襲明)의 시, 석죽화(石竹花)의 일부다.

아름답지만 들풀 숲에 피어났다가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패랭이꽃처럼 박내후 화백도 세상에서 잊혀질 뻔했다. 그러나 타계한 남편의 예술세계가 사라짐을 안타깝게 여긴 부인의 끈질긴 노력에 의한 계속되는 유작전으로 그의 예술세계는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제 그의 그림들은 살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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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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