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웅 중구난방] 매춘의 역사와 결혼의 탄생

김대웅 승인 2024.04.20 06:13 의견 0
김대웅 문화평론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김대웅 중구난방] 매춘의 역사와 결혼의 탄생

성(性)을 팔고 사는 매춘(賣春), 즉 성매매는 ‘인류의 가장 오래 된 직업’이라고 말할만큼 그 역사가 대단히 길다. 난교(亂交)에 가까운 성생활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선사시대를 제외하더라도 인류의 정착생활과 매춘은 함께 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한 근거들은 역사시대에 들어와 곧바로 나타난다.

약 6천 년 전에 벌써 문화를 형성했던 바빌로니아에서는 모든 여자들이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신전 앞에 나아가 뜰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이 의무였다. 여자의 선택은 남자의 몫이어서 못생겼거나 나이 많은 여자는 몇 년씩 그 곳에 나가 남자가 자기와 성관계를 가져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남자들은 성관계를 갖고 나면 신전에 액수와 관계없이 돈을 바쳐야 했다. 돈을 안 바치면 불경죄로 처벌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돈을 주고 여자와 성관계를 가졌으니 매춘이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도 매춘이 등장한다. 야곱의 아들 ‘유다’가 아내가 죽은 뒤, 신전 앞에서 다말(Tamar)이라는 매춘부를 만나 성매매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의 큰 며느리였다. 큰 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작은 아들도 죽자, 친정으로 쫒아버렸던 큰며느리가 복수심으로 변장을 하고 시아버지와 대가를 받기로 약속하고 성관계를 맺어 임신까지 했던 것이다.

‘유다와 다마’(호레이스 버넷作) [사진=김대웅]


유다의 장남인 엘(Er)의 아내 다말. 장남 엘과 차남 오난(Onan)이 죽어 막내 셀라(Shelah)가 ‘형사취수제(Levirate, 兄死娶嫂制)에 따라 그녀와 혼인하기로 되어있는데, 시아버지 유다가 이를 기피하자 유다를 속여 그를 통해 쌍둥이 베레스(Perez)와 세라(Zerah)를 낳았다(창세기 38:12-30).

고대 그리스에서는 남자들에게 성적인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정식으로 공창(公娼)을 세우고 매춘부를 두었다. 그녀들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인류최초로 광고까지 했다. 고대 로마에서는 검투사들이 상대방을 잔혹하게 죽일 때까지 대결하는 경기장 앞에 창녀들이 기다리다가 흥분해서 나오는 남자들을 유혹했다.

심지어 매춘을 즐긴 황후도 있었다. 클라디우스 황제의 부인인 메살리나(Messalina Valeria, AD 22?–48) 황후는 황제가 잠들면 변장을 하고 하녀와 함께 궁전을 빠져나와 매춘굴로 향했다. 그녀는 가명을 쓰면서 어느 매춘부보다 열심히 일했으며 화대도 꼬박꼬박 모았다. 날이 밝으면 마지못해 아쉬운듯 궁전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금욕을 내세우는 기독교 교회가 직접 집창촌을 만들어 놓고 돈을 벌었는데 신부들이 단골손님이었다고 한다. 수없이 벌어졌던 크고 작은 전쟁에는 어느 곳이나 매춘부들이 따라다녔는데. 현지의 매춘부들과 치열하게 고객쟁탈전을 벌여야 했다. 종교전쟁이었던 십자군 전쟁에도 어김없이 매춘부들이 따라갔다.

매춘의 역사를 제대로 살피려면 책 한 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세상에 매춘이 생겨난 이래, 끊임없이 통제되기도 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매춘은 사라지지 않았다. 매춘에는 ‘사는 x이 있으니까 파는 x이 있다’는 영원한 경제논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부일처를 전제로 하는 ‘결혼’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대외적으로 공개선언을 하므로써 부부의 배타적인 성관계 등을 법으로 보호받는 제도인 결혼은 남녀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하기 위해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결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국가 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략결혼이 수없이 많았으며,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양가부모의 일방적 결정에 따라 남녀가 얼굴도 못 본 채 결혼해야만 했다. 그런가 하면 어렸을 때 부모끼리 정혼(定婚)해서 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 요즘의 결혼풍조는 사랑보다 조건을 우선하는 중매결혼이 성행하기도 한다.

또한 인류학자나 역사가들은 전 세계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일부다처제의 결혼형태가 80%가 넘었다고 한다. 오늘날도 아랍국가들 가운데는 여전히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 제도화된 일부일처제의 결혼이 반드시 남녀의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역사학자 에두아르트 푹스(Eduard Fuchs; 1870-1940)는 그의 역저 <풍속의 역사>에서 “일부일처제는 어느 시대에도 개인적인 성적 사랑의 결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는 인류가 이동생활을 끝내고 농경(農耕)으로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토지를 비롯한 사유재산이 크게 늘어났는데 그것을 남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적자(아들)에게 상속하려고 했던 것이 일부일처제 결혼이 탄생하게 된 시원이라고 주장했다.

김대웅 옮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제 2장 참조 [사진=김대웅]

이 같은 주장은 푹스뿐이 아니다. 오히려 푹스보다 앞서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민속학자인 루이스 모건(Lewis H. Morgan; 1818-81)과 독일의 사상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95)도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에서 똑같은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오직 자신의 핏줄인 아들에게만 재산상속을 하려면 한 명의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아내가 두 명이 넘으면 재산상속에서 분쟁이 생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한 명의 여자는 전혀 다른 남자의 접근이 없었고 철저하게 순결해야만 했다. 더불어 결혼한 뒤에도 철저하게 정조를 지켜야 온전히 자신의 혈통을 이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문제는 남자에게 있었다. 더욱이 남성우월사회가 오랫동안 지속되며, 모든 규범들이 남자들에 의해 만들어져 여자들을 더 한층 억압했을뿐 아니라, 여자는 오직 아이를 낳는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는 여자가 남자의 혈통을 이어갈 자식을 낳는 것을 일부일처제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공적으로 인정했다. 따라서 그들은 결혼이 사랑의 결과라든가, 결혼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푹스 역시 남녀의 사랑에 의한 자연적이고 순리적인 결혼이 아니라, 그 기원이 남자들의 독점적인 경제적 이익의 추구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결코 최선의 가족형태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기까지 남성우월사회가 동양에서 더욱 가혹하게 이어지면서 우리나라도 전통적으로 여자의 혼전순결과 결혼한 뒤의 정절, 남아선호사상이 절대적인 덕목으로 강요됐다.

서양에서도 겨우 20세기에 와서야 여성해방운동이 확산되고 피임약이 개발되면서 여성들이 억압과 구속의 굴레에서 차츰 벗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남녀평등이 상당히 정착됐으며 여성들의 의식도 크게 달라졌다. 그에 따라 일부일처제의 결혼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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