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컬쳐인사이트] 사르트르의 수박 그리고 프리다 칼로

이홍석 승인 2024.05.18 15:24 의견 0
이홍석 문화평론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홍석 컬쳐인사이트] 사르트르의 수박 그리고 프리다 칼로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예의, 여름이면 그 어떤 과일보다 여름과 가장 잘 어울린다거나 그것이 심지어 여름의 본질 중 한 부분을 상징하거나 여름의 어떤 실존적 형태일 것 같은 그런 과일이 있다. 그것은 일단 그 몸체의 크기부터 남다르고 겉과 속이 드러내는 강렬한 시각적 대비가 마치 20세기 초에 등장했던 야수파(fauvism)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를 연상케 하는 회화적 수법과 무척 닮았다. 실제로 마티스도 종종 즐겨 그렸던 이 과일의 이름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박(watermelon)’이다. 그러나 수박은 그 실존의 과정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제법 깊은 역사적 배경과 생태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과일이다. 때로는 채소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고, 인류와 오랜 세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과일이다.

수박(학명 Citrullus lanatus)은 과일 중에서 전 세계 재배량 1위인 바나나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많이 인간에 의해 재배되고 생산되는 과일이며 그 품종은 지금까지 약 1,000여 종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다. 수박의 기원은 한반도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 대륙에서 찾을 수 있는데 리비아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기원전 3,500년 전의 야생 수박 씨앗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재배되고 있는 수박의 조상은 수단의 코르도판 멜론(Kordofan melons)이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 할 수 있다.

“Why is there a watermelon there?”

수박이 현재의 수박처럼 처음부터 달콤한 과일은 아니었다. 기원전 2,000년에 이집트에서 재배되었지만, 현대의 품종과 맛이 달랐다. 이후 단맛이 나는 수박은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야 지중해 전역으로 번지기 시작했고, 수박 껍질과 과육, 질감과 맛도 상당히 달라졌는데 이는 인류가 수박을 끊임없이 개량한 육종학(breeding science)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한반도에는 고려 시대에 최초로 수박이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 간섭기 고려 출신의 원나라 장수였던 ‘홍다구(1244~1291)’에 의해 전해졌다는 내용을 ‘허균’이 전국의 토산품과 별미를 소개하기 위해 쓴 개설서 <도문대작, 1611>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앞선 시대에 북송의 사신 ‘서긍(1091~1153)’이 고려에 1123년 사신으로 한 달간 방문했다 돌아가 북송의 왕 ‘휘종(徽宗)’에게 보고한 <선화봉사고려도경, 1124>에서 수박이 고려에 있다고 기술하였지만, <고려도경>에 기록된 한자 ‘과(瓜)’가 지금의 수박을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한 추가 근거가 없어 애매한 자료가 되었다. 보고서 형태가 ‘도경(圖經)’이기 때문에 고려에 대한 많은 그림을 담고 있었지만, 북송의 멸망을 불러온 ‘정강의 변(1126년)’으로 <고려도경>에 담겨있던 모든 그림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는 북송의 사신에 의해 고려의 실상이 그림으로 기록되었던 정말 귀중한 보고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의해 문치주의를 내세웠던 북송이 멸망하며 이웃 나라 고려를 기록한 책까지 애꿎은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논리적 근거는 약하지만, 사실 수박은 멜론과 오이의 친척이므로 어찌 보면 북송의 사신 ‘서긍’이 그의 보고서에 일부러 기록한 ‘과(瓜)’가 정황상 지금의 수박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홍다구’에 의해 고려에 수박이 전해진 시기를 그의 사망시점인 1291년으로 잡아도 무려 167년은 더 앞당길 수 있는 수박의 실존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추가 자료가 없다는 것, 또는 어딘가에 자료가 있음에도 이에 대한 국내 연구가 뒤따르지 않아 찾지 못하고 있다면 모두 애석한 일이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추측일 뿐이다. 신사임당(1504~1551)의 ‘초충도 8곡 병풍’ 중 제1폭의 <수박과 들쥐>를 보면 수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조선 초기에 이미 수박 재배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인들과 더불어 한국인들도 수박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다. 여름이면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과일이기에 조선 민화에도 수박이 종종 등장한다. 또한 서양의 유명 화가들도 수박을 즐겨 그렸고 더러는 괄목할 만한 작품들을 남겼다. 이에 반해, 한국의 현대회화에서 수박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은 좀 의아한 일이다. 청과물 전시라고 조롱받을 정도로 아트페어에 숱하게 널려있는 과일 그림 중 수박을 소재로 한 그림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문화적 개성인가 아니면 세계 과일 생산량 2위인 수박에 대한 푸대접인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수박이 사과나 감과 같은 정물화에 미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웃자는 이야기이다.

Watermelons, Peaches, Pears and Other Fruit in a Landscape, Oil on Canvas, 1620~1672, Giovanni Stanchi


위 그림은 17세기 르네상스 미술 시대 정점을 찍은 ‘지오반니 스탠치(1608~1672)’의 정물화 중 한 점을 크리스티 미술관에서 소개한 작품이다. 1645년에서 1672년 사이에 그려진 스탠치의 수박은 현대 육종학(育種學)의 발전으로 수박이 완전히 바뀌기 전인 약 370년 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지금의 수박과 무척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 Existence precedes essence. ”

이제 사르트르의 수박은 프리다 칼로와 무엇으로 연결되는 것일까에 대한 궁금함이 증폭되었기를 바란다. 수박 이야기로 신문 지면의 칼럼에서 ‘본질(essence)’과 ‘실존(existence)’에 대한 실존주의 철학의 개론을 펼치려고 하는 것은 혹시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겠지만 고백하건대 진심 어려운 철학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나의 실존적 해석은 겨우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럴 때, 수박이란 얼마나 유용한 비유인지, 백 년 정도는 껍질을 핥아야 드디어 단맛이 나오는 붉은 과육에 혀가 도달하려나?

예의, 사르트르의 실존적 태도, 조금 우겨서 수박이 세상에 어떻게 규정되었는가의 본질보다는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실존에 관한 이야기, 한 개인 또는 시대를 관통하려는 작가들과 실존적 태도는 상호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알려진 사건들과 인물들 그리고 수박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여름을 맞이하며 알아두면 쓸모있는 하나의 ‘썰’ 정도로 풀어보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실존주의에 관련하여 약간의 선행학습과 같은 정보는 필요하겠다.

친절한 한 마디로 실존(existence)은 본질(essence)에 앞선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가 1945년의 그의 강연 <실존주의는 인문주의일까>에서 최초로 이 개념을 말했다. 세상의 본질(신, 영혼, 고정불변 따위의 신념)을 연구해온 기존의 철학을 뒤엎는 문제적 발언이자 본질에 매달렸던 세상의 질서에 대한 저격이었다.

존재가 등장하기 이전에 본질은 없다. 실존은 이념적인 본질과 대비되며 본질이라는 허상의 ‘밖에 서’ 있는 현실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지금 여기’ 그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 방식’과 ‘생존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며 자각하는 존재이어야 하며, 그로써 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개성이 발현될 수 있다고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이러한 실존이 본질을 결정하게 되며 실존의 본성은 자유(고통이 수반되지만)이고 ‘밖에 서’ 있음을 선택함으로 무한의 자기 초월이라는 과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허무주의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종종 실존주의 문학의 독특한 문장 형태나 냉소적 태도에 의해 허무주의로 오인되어 읽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실존주의는 인간 존재에 깊은 사유를 두고 있는 휴머니즘 철학이다.

사르트르이건 수박이건 이 정도만 겉을 핥아야 하겠다. 더 말하다 보면 가진 것이 전부 들통날까 부담스럽다. 어쨌든 실존주의에서 존재는 우연히 발생한다. 세상의 본질은 비어있고 우연한 존재가 등장하여 주체적으로 그 본질을 채워나가거나 관계하는 것이 실존의 형태다. 참고하자면 하이데거는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를 실존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프랑스 책이라 독일어판 표지에 쓰기도 했다. 어린 왕자처럼 자기 스스로 기획하고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짧은 인생 긴 예술적 여운을 남긴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의 작업과 그의 삶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평생 143점을 남긴 그의 작품 중 1/3에 해당하는 55점이 프리다 칼로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다. 이것은 매우 치열했던 자기 기획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실존에 관한 질문과 탐구의 결과를 남겼다. 알려진 대로 비극적 사건들로 얼룩져 슬픔에만 빠져있었던 프리다 칼로였다면 그는 실존이 아닌 삶의 본질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물론 본질인가 실존인가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Self-Portrait with Thorn Necklace and Hummingbird, Oil on Canvas, 1940, Frida Kahlo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유언은 “떠나는 것이 즐겁기를 바라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라는 것이었다. 실존주의자들은 본질은 비어있고 실존은 그 본질의 밖에 서서 적극적인 자기 초월의 수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실존은 강렬한 자유이자 동시에 고통의 산물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작가들은 대개 이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프리다 칼로는 소아마비, 교통사고, 실연, 이혼 등이 규정한 본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실존하고자 노력하였고,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고유한 개성을 갖는다는 점에 있어서 세상의 본질에 맹렬히 저항했으며 실존에 대한 나름의 답을 얻었으리라 생각된다. 그가 남긴 55점의 자화상에서 허상으로 채워진 아름다운 본질이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실존하고자 했던 한 개인의 집요한 질문들을 읽어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개념도 상실하고 그 방향성도 잃은 채 세상에 흔해 빠진 장식품으로 전락한 팝아트가, 사실은 예술의 빈 껍질인 이념적 본질에 대한 실존적 질문이자 저항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뒤샹, 리처드 해밀턴, 앤디 워홀, 리히텐슈타인 등이 이끈 반예술적 동력이 자본에 구걸하는 현재의 구차한 팝아트가 되어 비웃음을 살 거라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실존은 삶을 제대로 이끄는 실전 기술이 되기도 하고, 예술을 예술답게 이끄는 철학적 기술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 개인이든 작가든 실존을 이해하고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Viva la Vida”

세상의 본질(신, 영혼, 고정불변 따위의 신념 등)적인 시각에서 프리다 칼로의 삶은 대다수가 불행이라 말한다. 모두가 그의 불행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에 나는 결코 동의하기 어렵다. 가령 고흐를 이야기할 때도 사람들은 역시 그의 정신병력이나 불행한 행적에만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왜일까? 그것은 세상에는 불변하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상정되는 안정적인 현상이 매우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본질은 시대를 통틀어 매우 강력하고 선한 것으로 간주 되어 왔다. 선량한 것은 곧 아름다운 것, 그 아름다움의 본질을 추구하는 작가는 마치 신의 본질처럼 고통받거나 순교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작가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실존적 질문에는 별 관심이 없고, 대개는 그들이 얼마나 삶에서 강렬하게 고통받고 순교하였는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고흐의 권총 자살과 같은 미술 괴담이다. 수사와 탐문 결과, 의학적 소견과 고흐의 행적 그리고 고흐에게 존재하지 않는 권총과 용의자의 고백 등, 그가 자살하지 않았음을 제시하는 다수의 증거에도 그를 끝내 권총 자살로 몰고 간 어리석은 미술사가 그렇다.

유력한 용의자인 ‘르네 세크레탕(Rene Secretan)’이라는 유복한 집안의 망나니 16세 소년에게 총상을 입고 합병증으로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세상은 고흐가 살해되었다는 진실보다는 거룩한 순교의 환상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편리했던 것이다. 환상은 가치를 만들고 심지어 물질적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고흐는 살아서 제대로 그림을 팔지 못했으나 비로소 순교자가 되어서야 그의 그림들은 세상에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환상은 더욱 신봉되며 사회는 집단적 이기심에 빠져 결코 실재하는 것을 정직하게 보려 하지 않는 쪽으로 더 다가간다. 실존주의 입장에서 이는 참으로 불편한 환상이며 암흑과 같다.

사실 본질이 비어있다면, 존재자가 드러나야 비로소 본질이 뒤따른다면 이는 본질에 천착하여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경향에 큰 혼란을 일으킴과 동시에 현재의 삶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다소 번거로운 선언이기에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리다 칼로 또한 그의 실존적 질문과 상관없이 페미니즘의 순교자가 된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프리다 칼로는 21세 연상인 멕시코 미술계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에 가득 차 마침내 결혼하였고 이혼하였으며 다시 재혼하기를 반복하였다. 결혼생활은 그들의 이상이나 예술과 달리 거추장스럽고 삐걱거렸다. 타고난 디에고의 호색적 기질은 프리다 칼로의 언니까지 불륜에 끌어들이며 둘의 결혼을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 프리다 칼로의 서사는 보통 그가 어려서 앓았던 소아마비나 교통사고와 함께 대개 이렇게 시작된다. 사실이긴 하겠지만 매우 진부한 내러티브(narrative)가 아닐 수 없다. 프리다 칼로, 그의 삶의 전개가 진부한 것이 아니라 구태여 개인의 역경을 끌고 들어오는 서사의 방식이 역시 작가를 설명하는 본질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였을 것이라 의심되기 때문이다. 이는 환상이고 괴담을 즐기는 비합리적 사회 풍토다.

이것은 마치 세상에 정해진 아름다움이나 절대적 선이 있다고 보는 고정된 시각에서 서사를 시작하는 것은 아닌지 역시 의심된다. 본질이라는 것, 프리다 칼로는 생전에는 피카소와 교류하던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로 더 유명하였다. 사실 그의 그림이 알려진 것은 사망 후 20여 년이 지나서이다. 사후 프리다 칼로를 세상으로 불러낸 것은 뜻밖에 1970년대 등장한 페미니즘의 선택이었다. 예술가 프리다 칼로의 예술적 업적이 아니라 혹여라도 페미니즘의 선동적 수단이 되었다면, 본질이 실존을 왜곡한 또 하나의 ‘고흐의 권총 자살’과 같은 맥락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은 기존의 질서, 세계의 본질이라는 남성 위주의 사회 밖에 서서 여성의 실존적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자면 그 자체는 진보적이다. 그러나 프리다 칼로를 그 실존적 질문을 위해 다시 그들이 상정한 세계의 본질(신마저 남성인 세계에서 고통받는 여성)로 던져 넣었다면 그건 모순일 수밖에 없다. 당시의 여성운동이 스스로 던진 질문의 깊이에 끝내 도달하지 못한 교활한 선택일 수 있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양성애자이며 자유연애를 신봉하였기에 바람둥이로 규정한 디에고 리베라를 대척점에 두고 평가하는 것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고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규정 또한 본질의 특성이다.

프리다 칼로가 20년이나 앞서 이후 1970년대에 등장할 여성운동에 불을 지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뉴욕을 거쳐 파리까지 진출하여 전시를 이어가자 디에고의 친구였던 피카소, 칸딘스키, 뒤샹과 같은 거장들이 프리다 칼로를 ‘초현실주의 화가’로 추켜세웠는데, 그때 프리다 칼로는 그들의 칭찬을 거부하며 “나는 꿈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현실을 그린다”라며 단호하게 말했을 정도로 대담한 실존적 태도를 지닌 인물로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어쩌면 1970년대의 남성 위주의 사회적 본질에 매달린 페미니즘보다는 더욱 진일보한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1944~)의 사이보그 선언과 같은 새로운 이종과 적극적으로 결합하려는 실존적 페미니즘의 사유가 프리다 칼로를 선택했더라면 더 합당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운명은 가혹했다. 그러나 그에게 실존은 예측 가능한 것들이었다. 세상으로부터 핍박받은 비운의 삶을 살다간 ‘여류(女流)’라는 좁은 페미니즘의 잣대가 프리다 칼로를 순교자로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평생의 예술적 노력과 업적에 또 다른 가해를 일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분별하여야 한다. ‘지금 여기’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을 혹독한 것으로만 파악했다면 독특한 프리다 칼로의 예술적 결과들이 멕시코에서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즐거운 퇴장이자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다, 말한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수박 그림에는 오래도록 인류에게 기억될 짧고 강렬한 찬사를 남겨두었다. “Viva la Vida”, 인생이여 만세 그의 실존적 부재를 축하했고 남겨진 자들의 삶을 격려했다. 죽음을 예감한 순간, 세상에 대한 그의 깊은 파토스(pathos)가 처연하다. 그의 마지막 파토스는 훗날 또 다른 대중 예술가에게 맹렬한 영감을 불러일으켰으니 끝까지 프리다 칼로의 길에는 그 위대한 방향이 있다.

Viva la Vida, Watermelons, Oil on Canvas, 1954, Frida Kahlo


멕시코를 중심으로 중남미에선 수박이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과일이다. 매년 11월의 첫째 날과 이튿날은 ‘죽은 자들의 날(The Day of The Dead)’로 국가 전체가 기념하는 휴일인데 지역에 따라 조금씩 기념일 날짜를 달리하는 곳도 있다. 가족 중심 그리고 모계 중심인 공동체 사회에서 출산과 죽음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멕시코에서 죽은 자들의 날은 슬픔보다는 대체로 즐거운 축제의 형태로 기념하는데 가족들은 이 기간에 모여 죽은 친구와 가족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수박이다. 우리 한국의 제사상에 사과나 배와 같은 과일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과 같이,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에 차려지는 제단에는 고인을 기리는 메리골드(Mexican marigold) 꽃장식과 함께 반드시 수박이 함께 올라간다.

이는 수박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며 그 씨앗은 불멸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 수박은 중남미에서 현실적 죽음과 내세의 불멸을 동시에 포섭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죽음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선 부지런히 출산하여야 하고 삶은 다시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실존의 과정에 있다.

Frida Kahlo and Diego Rivera, 1952


프리다 칼로는 1954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주일 전,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생의 마지막 작품인 수박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남편 디에고 리베라에게 그들 부부의 은혼 기념일 반지와 함께 그림을 선물했다. 마지막 메시지 “Viva la Vida”를 그림에 새겨 넣었는데 디에고 리베라에게 오래 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프리다 칼로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에 만세를 외친 것일 수도 있겠다. 프리다 칼로는 제단에 올려지는 수박의 상징처럼 불멸을 갈망하지도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1954년 그의 실존은 영원히 그 순간에 끝나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죽던 날 밤, 디에고가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묻자 프리다 칼로는 “곧 당신을 떠날 것 같아서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일기의 마지막엔 “떠나는 것이 즐겁기를 바라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적혀 있었다.

평생의 병마와 사고와 여러 차례의 유산과 우울증, 그리고 다리를 절단하는 과정까지 프리다 칼로가 감당하고 겪었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고통은 어쩌면 실존주의 철학 따위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개인의 거대한 우주가 통째로 절망의 입자로 가득 찬 채, 영원히 빛마저도 도달하지 못하는 암흑의 물질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세계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열정을 다해 디에고 리베라를 사랑했고, 그에 못지않은 회화적 세계를 구축하였다.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의 죽음이라는 실존의 부재를 맞이하고서야 그의 인생에 있어서 프리다 칼로가 어떤 존재였는지 깨달은 듯하다. 그는 나중에 프리다의 죽음을 “내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이라고 말했으며 너무 늦게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멋진 부분이 프리다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프리다 칼로가 세상을 떠나고 3년 뒤, 1957년 디에고 리베라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역시 그의 마지막 작품도 수박 그림이다. 프리다 칼로에게 헌정한 그림이었을 것이라 세평은 말하고 있다. 20세기 멕시코를 배경으로 기괴하고 맹렬하게 펼쳐졌던 이들의 사랑과 예술적 실존이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그런 장렬한 ‘엔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The Watermelons, Oil on Canvas, 1957, Diego Rivera


앞서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수박 그림에 새겨진 “Viva la Vida”라는 문구는 또 다른 대중 예술가에게 맹렬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고 언급했다. 그가 바로 1996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얼터너티브 록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다.

육체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삶을 찬미한 예술적 아이러니를 반영한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본 콜드플레이의 리드 보컬 크리스 마틴은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많은 고통을 겪었고, 그 후 ‘Viva la Vida’라고 쓰인 큰 그림을 그렸는데 그 대담함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거기에서 영감을 받고 그림에 적힌 문구를 따와서 콜드플레이의 4집 앨범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라는 명반이 2008년 탄생하게 된다.

그중에서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을 입힌 콜드플레이의 ‘Viva la Vida’에 관련해 크리스 마틴은 지금 그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보다는 이전에 쌓아온 것을 무너뜨리고 더 나은, 혹은 좋은 방향으로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며 이전에 해본 적이 없는 곡이며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라 말했다.

이 곡은 2008년 발표되면서 36개국 차트에서 1위, 2008년에만 680만 장을 판매하며 장르 불문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그래미상 3관왕까지 수상했다. 1954년 프리다 칼로의 메시지가 2008년 크리스 마틴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2024년 여전히 미개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세계를 향해 프리다 칼로의 메시지는 강렬하게 전달되고 있다. 크리스 마틴은 그 스스로의 음악적 동기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납득하는 것이라 했는데, 여기서 프리다 칼로와 크리스 마틴의 실존에 대한 공명이 이루어진 지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The Album Cover of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 2008, Coldplay


콜드플레이의 4집 앨범 커버에 쓰인 이 유명한 그림은 1830년 외젠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 1798~1863)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상(Liberty Leading the People)’이다.

조금 설명을 붙이자면, 프랑스 혁명(1789~1799)은 잦은 참전으로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고 불평등한 사회 체제에도 불구하고 전제적인 왕권을 펼치려 하던 루이 16세를 민중이 봉기하여 프랑스 역사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왕을 단두대로 보내 처형한 사건이다. 민중의 개혁 의지는 강해졌고 농민들마저 반란을 일으켰으며 봉건제 폐지와 더불어 인권선언에 이르게 된다. 사상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재산, 투표, 과세의 평등이 뒤따라야 한다고 민중은 주장했으나, 가톨릭교회와 왕족, 귀족과 장교들이 각자의 이권에 따라 반란에 가담하거나 진압에 나서거나 갈팡질팡하면서 당시 프랑스는 잔혹한 학살과 명분 없는 전쟁 그리고 반란에 끊임없이 시달리던 시대였다. 루이 16세의 처형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안정되지 못했고 유럽의 군주 국가들에겐 왕을 처형한 프랑스의 민중이 눈에 가시거리였다. 자기들 왕국에도 프랑스 혁명이 전염병처럼 번져 언제 왕권이 무너질지 모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기에 지속해서 프랑스 내부의 왕정복고를 비밀리에 지원했다.

이후, 루이 18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샤를 10세가 언론과 선거권을 제한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왕정복고를 획책하였으나, 1830년 7월 낡은 봉건 체제의 종말을 선고한 ‘영광의 3일’이라 불리는 혁명이 재차 일어났고, 당시의 상황을 들라크루아가 작가 개인의 감정과 상상력을 더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상’을 그렸는데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위대한 명화로 남겨졌다. 왕정을 끝내고 비로소 시민이 주인이 되는 역사를 여는 세계사의 시작이었고 이는 실존주의와 무관하지 않은 새로운 사상의 태동이었다.

Liberty Leading the People, Oil on Canvas, 1830, Eugène Delacroix,


고려 시대 원나라 무신 ‘홍다구’에 의해 한반도에 전해진 여름 과일 수박과 함께 야수파와 마티스를 이야기했고, 현재의 수박과 너무 다르게 생긴 르네상스 시대의 지오반니 스탠치의 수박 그림을 보았다. 사르트르에게 수박이 왜 거기에 있는지 실존적 자세로 물었으나 정작 사르트르가 수박을 좋아했을지 알려진 바가 없다. 웃음. 멕시코에서 현실적 존재자로서 수박의 의미를 찾아보았고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애절비장’한 수박 그림을 소개했다. 거기엔 기발하게 존재하고 열정을 다해 사랑하며 치열하게 작업하다 떠나간 예술가들에 대한 파토스가 짙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감정을 빼고 인물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프리다 칼로에 의해 영향받은 또 하나의 예술가 콜드플레이가 오마주(hommage)한 ‘Viva la Vida’를 소개했다. 앨범 커버에 쓰인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도 살짝 들여다보았다.

세상의 사건들은 각각 고고학의 단층처럼 독자적으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처럼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철학은 지질의 한 단층과 같다. 단단하며 그 층을 깨어야 다음의 층으로 갈 수 있다. 삶은 초끈이론과 같이 ‘끈’이면서 입자일 수 있는 아직 인류가 이해하기 어렵고 관찰할 수 없는 영역인 6차원과 같은 형태는 아닐지 생각된다. 그렇다고 삶에 어떤 본질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오늘의 관찰과 주장에서 한참 벗어난 일이 될 테니 아니라고 말해야 하겠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수박이 실존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관념에 머물던 수박을 현실적 존재(actual entities)로 대할 때 당신 삶의 자세가 즐겁기를 바란다.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올지 아닐지는 달고 시원한 수박이나 한 조각 베어 물고 생각해도 늦지 않겠다. 프리다 칼로는 본질과 실존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마지막 탄식은 2024년을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누군가에게 반드시 유효할 것이다.

인류가 초래한 기후 위기로 전례 없는 폭염이 예고된 2024년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오만과 독재의 광풍이 일으킨 지구촌 곳곳의 전쟁들을 당장 멈추고 평화롭게 수박이나 나눠 먹으며 안타깝게 죽은 자들을 기념하고 그들의 내일이었을 우리의 오늘, 삶을 찬미하는 보다 진일보한 인류가 되었으면 한다.

글 · 사진 이홍석,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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