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웅 중구난방] 오트 쿠튀르의 빛과 그림자
1944년 나치 점령에서 해방된 파리를 방문한 미국의 저널리스트들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파리의 오트 쿠튀르 산업이 그대로 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1940~1944년 독일군이 파리를 통치했던 기간 중에도 패션 산업이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전 세계로부터 분노의 소리가 드높았다.
그래서 당시 오트 쿠튀르 산업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1940년대 후반까지도 나치 협력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고발은 패션 시장을 손에 쥐고 있던 프랑스에 커다란 위협이 되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한 결핍 상태, 즉 경험이 풍부한 기술자의 부재, 소재의 부족, 설비나 자원의 심각한 할당제 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는 사치스러운 옷이 계속 생산되었다. 나치 군대가 파리를 침공한 1940년, 오트 쿠튀르도 폐점을 예상했으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나치가 파리의 문화와 경제를 이어받아 소위 ‘제3 제국(Third Reich; 나치의 국가명칭)’을 건설하는 데 오트 쿠튀르를 이용했던 것이다. 당시 이미 번창하고 있던 프랑스의 패션 산업은 그 이익을 적국 정부의 재정고에 상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나치가 프랑스를 지배하고 유럽 전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 셈이었다.
“정복, 유린, 혼돈이 극에 달했던 피점령국에서 사치스러운 패션을 위한 장소가 어디 있었단 말인가?”라고 루 테일러(Lou Taylor)는 묻고 있다. 몇 군데 유력한 메종(maison, 工房)이 문을 닫았지만, 대부분은 나치 점령기에도 영업을 계속했다. 당시는 상업적으로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했 이것은 아주 놀랄 만한 일이었다.
고객은 어느새 세계의 명사가 아니라 점령 체제하에서 특혜를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장 파투(Jean Patou), 잔느 랑방, 니나 리치, 샤를르 오르트(Charles Worth) 등이 점령 기간에도 별다른 문제 없이 영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새로운 고객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나치 협력자의 사교 생활에 공헌했기 때문이다.
파리의 오트 쿠튀르에 관한 이런 에피소드는 경제활동으로서 오트 쿠튀르의 중요성과 프랑스 경제에 대한 공헌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덧붙일 것은 패션이 사람들을 강렬하게 사로잡기 때문에 그것이 약속하는 쾌락은 정치나 경제의 긴급 사태보다도 우선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패션이 경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면 소비자는 과연 무엇을 바라고 패션을 구입했을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1930년대 후반 파리의 패션 산업이 프랑스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했다. 양자는 사실상 서로 의존하고 있었다. 패션은 일부 계급의 사치품으로부터 해방되어 대중화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리고 파리의 메종도 어느새 오트 쿠튀르가 상징하는 장인 기예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패션 비즈니스는 화장품, 향수, 액세서리, 고급 기성복을 통합했고, 중류계급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패션 산업은 프랑스 경제의 중추가 된 것이다. 만일 패션 산업의 불씨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꺼져버렸다면 전후 프랑스 경제의 부흥은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파시스트 체제와 결탁한 것도 한편으로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패션 산업은 국경을 넘어서 전개된다. 패션의 진원지인 파리의 지배력은 쇠약해지고, 19세기의 오트 쿠튀르에 남아 있던 독점적이고 귀족적인 성질은 변화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도 프로 크리에이터와 디자이너, 매 시즌의 컬렉션 그리고 호화스러운 의상을 입은 모델들의 라이브 패션 퍼레이드 등 오트 쿠튀르 식의 구조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새로운 단계로 발돋움하고 있다.
1920년대 오트 쿠튀르 전성기 때 장 파투의 공방은 1,300명의 직공을 거느렸으며, 샤넬은 2,500명을 고용했고,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1950년대까지 1,200명의 종업원이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5년에는 주요 공방 21개를 모두 합쳐도 직원 수가 2,000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고객도 전 세계에 걸쳐 3,000여 명의 여성밖에 없었다.
일부 유명 패션 공방들은 살아남기 위해 장인적 수공예에서 다각화 경영으로 탈바꿈했다. 향수는 샤넬, 파투, 랑방에 의해서 1920년대부터 판매되었는데, 이것이 패션 산업의 주력상품으로 정착된 것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이 무렵까지는 향수, 화장품, 패션 액세서리, 브랜드의 라이선스 비즈니스(가죽 제품, 식기, 펜, 속옷, 라이터 등)가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오트 쿠튀르의 신작 발표회는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끌고 있지만, 메종의 재정적 기반은 이미 거기서 자리를 옮긴 지 오래였다. 예컨대 1980년대 중반까지 입생 로랑의 수익은 대부분 라이선스 사업의 로열티에 의한 것이며, 최근 10년 동안 피에르 가르뎅, 니나 리치,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수익도 자사 제품보다는 오히려 로열티의 비율이 더 크다.
최근에는 액세서리를 장식한 프레타 포르테의 생산도 중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고급 기성복은 유명 브랜드의 라벨이 붙어 있어도 오리지널과는 달리 주문 생산이 아니다. 1994년 ‘라코스테(Lacoste)’는 2,300만 벌 이상의 의류를 생산해 전 세계 80개국에서 판매한 결과 연간 매상고가 7억 달러를 웃돌았다. 영국 의류 소매 체인인 ‘넥스트(Next)’의 총수익은 1982년부터 1986년까지 4년 동안 400만 파운드에서 9,200만 파운드로 급증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 영국에서는 패션 의류를 포함한 디자인 비즈니스의 수지가 세 배로 신장해 연간 25%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저작권자 ⓒ 더코리아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