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산 시담] 봄비, 쓰다

박미산 승인 2024.08.04 17:17 의견 0
박미산 시인, 작가, 백석 희당나귀 대표 [사진=더코리아저널]


[박미산 시담] 봄비, 쓰다 /박미산

꽃비들이 길을 터주네

시간을 데리고

오래전 떠나온 길로

소풍 가는 날은 항상 비가 왔지

논두렁 밭두렁을 걸어가던

송도는 단골 소풍지였네

낯 뜨겁던 사춘기가 송도에 있었네

검은머리갈매기가

아슬아슬하게 떨어질 것처럼

‘산다’는 것이 목구멍에 시커멓게 걸쳐있었지

난파된 사춘기를 모자에 감추고

관광객들이 몰려오던 매점 앞에서

‘브라보콘’을 팔았네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굴러왔네, 그 애 앞으로

심장은 마르고

햇빛은 손목을 긋고

자존심은 소금물에 젖어 너덜거리고

친구들은 갯벌에 빠진 아이를 읽는지

안 읽는 척했는지

봄비는 쓰디썼지

꽃잎이 경적을 울리며 도착한 봄

바닷속 길이 밀물에 잠기기 전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던 아암도도

눈물의 행간이 넘쳐나던 송도유원지도 사라지고

저녁 불빛 받은 중고차만

비를 맞으며 시를 쓰고 있네

...

학교 소풍 가는 날은 늘 비가 왔다.

우리 소풍 장소는 주로 송도유원지였다.

논두렁 밭두렁을 한 시간 정도 걸어가면 도착하는 송도유원지.

송도유원지는 수영뿐만이 아니라 보트를 탈 수 있었고 물이 빠지면 아암도를 건널 수 있었다.

소풍 장소로도 데이트하기에도 좋은 송도였다.

어느 벚꽃 날리던 날, 문득 송도가 생각나서 무조건 차를 몰았다.

추억이 서린 송도유원지는 사라지고 아암도도 사라지고 매립된 그 자리엔 중고차가 가득 있었다.

아름다운 추억보단 쓰라린 추억의 장소인 송도.

아이스크림다운 아이스크림인 해태 브라보콘이 처음 나왔을 때

난 여름방학을 맞아 송도 매점에서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용돈을 벌기 위한 게 아니고 살기 위해서였다.

한 떼의 학생들이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몰려왔다.

우리 학교 아이들과 제물포고등학교 아이들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나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고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는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은 뛰고 찬란한 햇빛은 돈을 건네받는 내 손목을 무참히 긋고,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행스럽게도 친구들이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쓰디쓴 봄비를 맞고

자존심이 너덜너덜해졌던 사춘기의 송도는 이제 아주 사라졌다.

나의 사춘기는 생생하게 되살아나는데,

...*** 필자소개 / 박미산

시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전공. 문학박사.

문화공간 (백석, 흰 당나귀 )운영.

1993년 <문학과 의식>수필 등단

2006년 <유심> 시 등단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루낭의 지도』, 『태양의 혀』,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

저작권자 ⓒ 더코리아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