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동서남북]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이십대 때부터, 사회문제를 이야기할 때 '사회구조'만을 강조하는 담론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상당히 단순했다. 20대의 나는 이 세상의 문제를 파헤치고,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내 인생을 살아야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거대담론을 성찰하고 세상을 바꾸는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취업을 하든, 학위를 따든, 이 사회 안에서,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먹고 살며 나의 꿈을 실현하며 나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당시 나의 첫 책이었던 <청춘인문학>이나 이후의 <분노사회>에서도 1부, 2부는 모두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3부는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세상에는 비판할 거리도 한 가득이고, 바꿔야할 거리도 한 가득이지만, 어쨌든 세상이 바뀌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인생은 지나가고 있었고, 나는 20대든, 30대든 반드시 좋은 삶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종종 사회학 책들을 읽다 보면, 모든 종류의 자기 자신을 위해 애쓰는 일들을 비판하고, 심지어 개인의 행복 추구까지 비판하는 걸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개개인의 삶의 노력을 비판하는 사회학자들도 이 체제 안에서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학위 논문을 쓰고, 교수직을 얻거나 책을 팔기 위해 애쓴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태도를 꽤나 분명하게 정했다. 그것은 '분열'이었다.
세상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는 한 비판하되, 개인 단위에서는 개인적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분열적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은 없이, 무조건적인 성공만을 지향하는 건 그것대로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였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좋은 삶'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그것이 타인들의 희생이나 타인들에 대한 착취, 그리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으로는 도통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분열의 간극을 어떻게 하면 좁힐 수 있을지를 늘 고민해왔다. 사회 변화만이 중요하다면서 개개인의 노력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식의 담론은 내 안에서 기각되었다. 반대로, 각자도생 사회에서 나 하나만 어떤 식으로든 성공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극단적 원자주의도 내 안에서 배제되었다. 대신, 최선을 다해 나의 삶을 계발하되, 동시에 이 사회에도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기여하면서, 내 삶 안에서 그 두 가지의 마음을 통합시킬 수는 없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왔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개인' 역시 하나의 '사회'로 봐야 한다는 관점을 취하길 선호한다. 예를 들어, 내가 좋은 사회를 외치면서, 일상에서는 부하직원한테 함부로 대하고, 권력 구조 안에서 위계에 의한 성범죄나 저지르는 것은 '내 안의 사회'를 죽이겠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신, 내가 합리적이고도 배려 있는 관계를 맺고자 애쓰고, 나의 일이 그 누군가에게 기여하길 바라며,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내 안의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나는 평생 살아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모순이고, 그 모순은 완전히 해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양자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 간극이 좁아지면서 한 점으로 수렴될 수 있길 바라면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이번 책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는 역시 그런 한 시도의 일환이다. 나는 이 책이 자기계발서이면서 자기계발서이지만은 않길 바랐고, 동시에 이 사회에 대한 어떤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면서도, 그런 비판에만 매몰되질 않길 바라는 어떤 '불가능한 지점'에 서길 바랐다. 그것이 내게는 가장 중요한 시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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