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동서남북] 우리 시대 결혼과 육아는 욕심이 되었다.
적지 않은 청년들이 결혼이나 육아가 나에게 '욕심'에 가깝다고 생각하곤 한다.
아이 키우는 일은, 양가에서 몇 억쯤 지원 받아서 10억쯤 하는 대단지 아파트를 살 수 있고, 양가 집안 중 한 쪽이 아이를 돌봐줄 수 있으며, 아이를 원어민들만 있는 영어유치원 정도에는 보내줄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 믿는 것이다.
아이 키우는 일은 당연히 해야하거나, 매력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라, 과욕이자 욕심이고 탐욕에 가까운 무엇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실제로 온라인에만 하더라도, 온갖 일들을 구실 삼은 부모에 대한 규탄이 넘쳐난다. 식당에서 아이한테 유튜브만 보여줄 거면 뭐하러 키우냐, 반대로 아이에게 유튜브 보여주지 않고 아이가 시끄럽게 굴면, 아이 제대로 케어도 못하는 자격미달 부모들이다, 그런 말들이 매우 손쉽게 이루어진다.
나아가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내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일종의 죄이고, 욕심일 뿐이라는 체념과 포기, 죄책감까지 엿보인다. 이런 정서는 일부의 특이한 정서가 아니라, 상당히 '보편적 정서'에 가까워지고 있다.
물론, 아이 낳아 키우는 것 자체보다 다른 삶을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끼는 경우도 많다. 가령, 제주도에 가서 카페나 게스트하우스를 차리고 매일 스쿠버다이빙 하는 삶, 해외를 여행하는 것으로 돈과 유명세를 얻는 여행 유투버의 삶, 그렇게 화려하지 않더라도 작은 소품이나 팝업 스토어, 건강한 취미생활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단독자의 삶 같은 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매력적인 출구가 되어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굳이 '아이 키우는' 욕심을 내는 건 자기에게는 7대죄악 중 하나인 탐욕이라고 생각할 법도 하다.
나 같은 경우도,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아이를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이가 싫어서라기 보다는, 아이 키우는 삶이 내 꿈도 아니었고, 그런데 나는 '꿈'을 이루기엔 아직 한참 모자라게 느껴졌고, 특별히 돈을 잘 벌거나 받을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집도 없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오래된 중고차 하나인데, 아이 키우고 하는 건 언감생심, 어딘지 달나라 사람들의 일처럼만 느껴졌다. 그러다 아이는 일종의 우연이나 운명처럼 찾아왔고, 그때부터 삶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좌충우돌의 삶이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수험생이 직업도 없었고, 그전까지도 대학원생으로 살아오느라 모아놓은 돈도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어지쩌지 아이는 키워낼 수 있었고, 지금도 무슨 최고의 럭셔리한 교육과 환경을 제공하는 건 아니어도, 나는 아이가 행복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아이로 인해 우리는 전에 없던 행복을 경험했다. 이것은 문을 열고 들어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매미처럼 곁에 붙어 뒹굴거리며 삶을 함께하던 아이는 조금씩 커나가면서, 뭐랄까,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요정 같은 존재가 되었다. 웬디가 마법의 가루를 뿌려주듯, 아이와 함께 있으면 세계가 달리 보였다. 바다와 갯벌은 더 이상 구경하는 게 아니라 뛰어드는 곳이 되었고, 나무는 그냥 그늘이 아니라 온갖 풍뎅이와 매미를 찾는 보물창고가 되었다. 공동의 삶을 지키기 위해 나는 조금 더 강해졌고, 책임감이 있어졌으며,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그냥 딱딱한 어른이 된 게 아니라, 이 말랑말랑한 존재가 초대하는 어린이의 세계를 가진, 말하자면, 말랑말랑한 어른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우리 사회가 개개인들에게 '결혼과 육아'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사회문화적인 압박과 새로운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의 현상 등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결혼과 육아가 반드시 달나라 이야기만은 아니고, 적어도 우리가 걸어서 갈 수 있는 어떤 대륙에 속한다는 것 역시 이해하게 되었다. 그 대륙으로 가는 여정이 마냥 쉽지는 않고, 또 그 대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무조건적인 천국은 아니어도, 가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건 안다. 삶에는 힘들어도 가치 있는 일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일도 그런 일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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