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일지] '진정한 자유인'은 여섯 가지를 실천한다

박한표 승인 2024.09.01 21:57 의견 0
박한표 인문운동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한표 인문일지] '진정한 자유인'은 여섯 가지를 실천한다

긴 글이지만, 휴가철에 천천히 읽고 사유할 내용이다.

나도 긴 호흡으로 노자 <<도덕경>>을 다시 정리하고 있다. 노자가 꿈꾸는 '성인', 내 방식대로 말하면, '진정한 자유인'은 다음 여섯 가지를 실천한다.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이라 본다.

▪ 성인처무위지사(聖人處無爲之事)하고,

▪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하고,

▪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하고

▪ 생이불유(生而不有)하고

▪ 위이불시(爲而不恃)하고

▪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하고, 부유불거(夫唯弗居)하면, 시이불거(是以弗居)하다.

이를 쉽게 말하면, 성인, 즉 자유인은

▪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한다.

▪ 모든 일이 생겨나게 하지만 참견하지 아니하고,

▪ 낳았으면서도 소유하지 않는다.

▪ 할 것 다 되게 하면서도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을 내가 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공을 주장하지 않기에 이룬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다.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천천히 읽고, 이것을 일상에서 실천하면, 노자가 말하는 '성인'의 길을 걸을 수 있다."經(경)이 길을 자르쳐 주진 않는다/길은/가면 뒤에 있다."(황지우)

노자는 '스스로 그러함'의 도를 체득한 자를 '성인'이라 한다. '성인'은 무위의 일, 즉 도를 따르는 일만을 할 뿐, 인간의 상대적 분별이 개입된 억지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 만사형통 하다. 또한 분별로 성립되는 말, 언어의 한계를 알아, 말없이 본보기를 보이는 가르침을 행하여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한다.

'무위(無爲)'는 '도'에 따르는 행위이고, 비움을 행하는 것이다. 반면 '유위(有爲)'는 상대적 분별을 따르는 억지 행위이고, 채움을 행하는 것이다. '무위'는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그러함(자연)'의 '도'를 깨닫고 따르니 만사형통이다. 반면 '유위'는 상대적인 분별의 안경을 쓰고 일을 보고 일을 하니, 힘만 들지 되는 일이 없다. '유위'를 쉽게 말하면, '억지로' '일부러'라는 부사가 붙는 행위들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그렇지 않다. '저절로' 이루어지게 하는 거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무위'하다. 어떤 것을 좋아해서 살려 주고, 어떤 것을 싫어해서 죽이지 않는다. 오직 '스스로 그러함'을 따를 뿐이다. 그래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을 했다. "천지불인"에 대한 왕필의 주석을 소개한다. "천지는 항상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자신을 맡긴다. 천지는 억지로 함이 없고 조작함이 없다. 그래서 천지가 생하는 만물도 스스로 서로의 관계 속에서 질서를 형성해 나간다 그러므로 불인(不仁)하다고 말한 것이다. 인(仁)하다고 한다면, 반드시 조작적으로 세우는 것이 있고, 베풀어 변화를 주게 된다. 그리고 은혜가 있고 만들어 줌이 있게 된다. 조작적으로 세우고 베풀어 변화를 주게 되면 사물은 진정한 본래 모습을 상실하게 된다. 은혜가 있고 만들어 줌이 있으면 사물은 자력에 의하여 온전하게 존속되지 못한다. 자력에 의하여 온전하게 존속되지 못하면 천지는 구비된 조화를 이룰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천지는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아니한다'는 거다. 천지 그리고 성인들로 대표되는 '도(道)는 한결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를 향해 나를 더 사랑해 달라고 조르거나 간구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니 '도'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이기적 요구 사항에 좌우되지 않으므로 오직 한결같은 '도'의 근분 원리에 우리 자신을 탁 맡기고 쓸데없이 안달하지 않는 태도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분별이 개입된 유위의 행동은 좋은 것은 가까이 하려 하고, 나쁜 것은 멀리 하여 하니 불행과 부자유를 자초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스스로 그러할 뿐, 좋고 나쁨이 없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상대적 분별을 비우면 '스스로 그러함'을 받아들이고 따르며 만사형통의 "무위의 행"이 가능하다. 예컨대, 말이라는 것은 분별의 기초로 한 '유위'의 행동으로, 분별의 집착을 강화시킬 수 있고, 모든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또한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진다는 "多言數窮(다언삭궁)"처럼 , 말은 재앙의 문이 될 수 있음으로 줄이는 것이 상책이라는 거다. 말보다는 "무위의 행"으로 주위 사람들의 본보기, 즉 "블언지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자녀는 부모를 닮기에 부모는 항상 '무위의 일'에 처하여 "불언지교"에 충실해야 한다, 말을 줄여 고요함을 '도'답게 지키고 스스로 그러함의 '도'를 깨닫고 나누는 기쁨을 가져야 한다.

우선 "무위지사(無爲之事)"란 말은 '함이 없는 함'으로 풀어 볼 수 있다. 그래도 '무위'라는 말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런데 도올 김용옥 교수의 설명이 좋다. "'무위'는 '위(爲, 함)'가 부정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의 최대 특징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서 위(爲)가 되는 것이다. 즉 무엇인가 행동해야 하는 거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위(爲), 즉 '함(doing)'의 존재이다. 그러니까 '무위'라는 것은 '함이 없음'이 아니라. '무(無)적인 함'을 하는 것이다. 생명을 거스르는 '함'이 아닌, 우주 생명과 합치되는 창조적인 '함'이며,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에 어긋나는 망위(妄爲)가 없는 '함'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자는 우리들에게 "무위지사(함이 없는 함)" 속에서 살라고 권유하는 거다. '무위'에 대비되는 '유의', 즉 무엇인가 자꾸 억지로 하려 하지 말고, 내버려두면 저절로 풀려나간다는 거다.

그리고 '성인', 즉 '자유인'은 "말이 없음의 가르침(不言之敎, 불언지교)"을 행한다고 했다. 훌륭한 가르침은 '불언(不言)'의 가르침이어야 한다. "교육이란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우며 살게 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위대하고 창의적인 모든 결과가 출현한다고 믿는다. 밖에 있는 별을 찾아 밤잠을 자지 않고 노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줘야 한다.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 혹은 자기에게만 있는 자기만의 고유한 별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언젠가 최진석 교수의 글에서 읽은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불언지교'이다.

'불언지교'란 말로 알 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느끼고 직접 자기만의 별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름 불러 주기를 통해, 고유한 자신의 이름 앞에서 이 세계에서 유일한 존재로 등장하는 경험하게 하는 거다. 그러면 피교육자는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말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로 가르치려 한다.

▪ 너 자신이 별이다.

▪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 이 세계에서는 바로 네 자신이 주인이다.

▪ 일반명사로 살지 말고 고유명사로 살아야 한다.

▪ 너에게만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휘해야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 대답보다는 질문을 잘해야 한다.

▪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런 말 대신,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 나는 내가 우리 속에서 용해되지 않고, 고유한 나로 존재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어떤 행위를 지적하여 교정하도록 말하기 보다는 상대가 스스로 교정하도록, 팩트만 이야기 한다. 행위를 교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의 지시보다는 사실만을 말 해 주고, 스스로 교정하는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행위 속에서 주인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일이다. 이게 노자가 말하는 "성인(聖人)은 '불언지교(不言之敎)'를 행한다"는 말이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성인'은 자연의 운행과 존재 형식을 모델로 삼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인격자로 진정한 자유인이다. 그리고 "불언지교"는 노자의 핵심사상인 '무위無爲'적 행위 가운데 한 유형이기도 하다. 거듭 말하지만, '무위(無爲)'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노자는 "무위지사"의 한 짝으로 "불언지교"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무위'와 '불언'은 상통하는 것이다. 제1장에서 이미 노자는 "도가도비상도"를 말함으로써 인간의 언어나 개념에 대한 불신을 토로했다. 이성이나 논리의 허구성도 경계했다. 따라서 그러한 '상도(常道)'에 대한 진실을 확신하는 자는 인생살이에서도 '언(言)'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침도 "언(言)'을 통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논리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지 않고, 말 없는 솔수수범으로 가르치는 거다.

'언(言)'은 개념적으로 규정하거나 정의를 내리는 방식의 언어활동을 의미한다. 종합하면 '불언의 가르침'이란 '침묵의 가르침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규정하거나 내용을 정해 주는 가르침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언지교"가 행해지는 맥락 속에서는 행위자나 피교육자가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 등장한다. 책임성을 가진 독립적 주체로 등장한다. 그래야, 우리는 별을 찾아 평생을 헤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을 아는 힘을 가질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른 이의 이름을 불러주고, 사실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일의 밑바탕에는 '사랑의 힘'과 믿음, 즉 신뢰가 필요하다. 이 사랑과 신뢰의 힘이 "불언지교"를 행하게 한다.

'사랑'의 "불언지교"는 교육의 공이 피교육자에게 돌아가게 할 수 있을 때 완성된다. 교육의 공을 차지한 사람이라야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생명력을 발휘하여 비로소 이 세계에 우뚝 서는 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성인'은 '무엇을 해도 반드시 자기 뜻대로 하려 하지 않기'를 행하는 자'이다. 그는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강하게 무장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드시 실행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건 주도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을 때라야 그려질 수 있는 풍경이다. 이건 '신뢰(信賴)'의 문제이다. 영화나 모든 예술이 다 그렇다. 예술가가 예술 향유자의 수준을 믿어야 한다. 신뢰의 문제이다. 믿지 못하면, 예술가의 의도를 못 믿을까 봐 일일이 설명한다. 예술은 소비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백이 만들어져야 한다. 영화의 경우로 들면, 관객이 영화 스토리에 직접 참여하여 함께 구성하는 형식이 아니라, 감독의 '일방 통행'을 구경했다는 느낌만 남게 하는 경우에 그 영화는 재미가 없다. 감독의 강압성만 있고 관객의 자발성이 없어진다. 관객은 없고 감독만 남는 형국이 된다.

자식과 부모와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불신하면, 갈등이 생긴다. 이는 모두 기준 때문이다. 노자는 제17장에서도 "말을 아끼라"고 말한다. 바로 '잔소리'를 줄이라는 말이다. '잔소리'는 '지켜야 할 것을 부과하는 이념이나 기준'이다. 이것을 줄이는 일은 잘못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자식 삶의 주도권을 부모가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갖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발성이 일어나고, 스스로의 존재적 자각이나 자부심이 더 크게 자리한다.

'성인'이 되는 길은 다른 세상 이야기같이 느껴진다. '성인'의 길은 쾌락을 포기한 따분한 길처럼 착각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성인'은 평온한 가운데, 진리를 깨닫는 유레카적 희열과 진리를 나누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몸이 있는 한, 100%의 성인은 없다. 성인에 근접해 갈수록 자유와 행복이 증진되니 우보천리(牛步天理)의 사자성어처럼 성실하게 노력하면 그 길로 걸을 수 있다. 노자의 주장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스스로 그러함'의 도를 깨달아 따르고 나누는 무위의 행이 성인의 길을 따라가는 거고, 자유와 행복의 길이다. 그 "길은/가면 뒤에 있다." 황지우 시인의 멋진 시를 만난다. 오늘 사진은 '무위'인가? '유위'인가? 동네에서 있었던 <유성재즈맥주페스티벌>에 갔다가 찍은 거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황지우>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

낙타야,

모래 박힌 눈으로

동트는 地平線(지평선)을 보아라.

바람에 떠밀려 새 날이 온다.

일어나 또 가자.

사막은 뱃속에서 또 꾸르륵거리는구나.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경)도 없다.

經(경)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러나 너와 나는 九萬里(구만리) 靑天(청천)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는 너니까.

우리는 자기야.

우리 마음의 地圖(지도) 속의 별자리가 여기까지

오게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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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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