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일지]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대한민국은 마침내 노벨문학상 원전 보유국이 됐다. 세계문학과 독자로부터의 완벽한 공인. 이제 한국문학은 한강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한강 작가의 대한민국 첫 노벨 문학상 수상을 두고 MBC 앵커가 “가려지고 왜곡되기 쉬운 시대의 아픔과 약자의 고통을 들여다본 작가의 수상이어서 안도감이 든다”면서도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말고 더 이상 시대에 역행하는 건 멈추길 바란다”고 밝혔다.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의 작품들을 두고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평했다. 이처럼 작가는 등단 후로 줄곧 인간이 인간에게 입힌 상처의 자리를 매만지며, 외면하고 싶은 트라우마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소설을 써왔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두고, 김명인 평론가가 발표한 주장들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음 네 가지이다.
▪ 한강은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난 작가이지만 그의 성취는 한국 근현대문학이라는 풍요로운 토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풍요로운 토양’이라는 말은 반어이다. 한국 문학의 풍요로움이란 ‘식민지-전쟁-분단-냉전-군사독재-압축성장-민주화-극한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관통한 완강한 가부장주의’ 라는, 근대 세계가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역경을 다 거쳐온 한국 근현대사라는 척박한 흐름 위에서 얻어진 역설적인, 문학적 풍요이기 때문이다.
▪ 최인훈, 이청준, 조정래, 황석영, 현기영, 박경리, 박완서 정도는 한국어라는 핸디캡이 없었다면 벌써 노벨상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작가들이었다. 다만 한국어라는, 서구어로 번역되어야만 하는 소수어로 쓰였다는 것, 게다가 노벨상의 국제정치학상 한국의 배당율이 워낙 낮았다는 것 등 악조건만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간 한국문학이 노벨상을 못 받아 문제였던가, 오히려 문학 생태계의 지속적 열화가 더 문제였지 않은가. 하지만 마침내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것은 우선 한국 문학이 한국의 문화적 위상 제고에 따라 번역 보급의 문제를 극복하기 시작했고 국제무대에서의 배당율도 높아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 적절한 때에 한강이라는 묵직한 작가가 존재했던 것이다.
▪ 그리고 조정래나 황석영의 소설들과 달리, 한강의 소설들에는 질문들은 무성하나 대답은 없다. 쓰고 있는 작가 역시 대답을 모른 채 질문의 형식으로 소설을 끌고 간다. 이것은 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적 글쓰기의 전형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게다가 한강 소설들의 여성 인물과 여성 화자들은 오래도록 확고한 진리의 세계(근대의 가부장적 남성들의 세계)에서 밀려나 있던 주변인, 소수자, 타자들의 형상으로 그들의 언어는 늘 진리에서 비껴난 형식으로 발화 되고 전달된다.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육식의 세계에서 보장받지 못해 소멸해가는 소수자 여성의 존재성을 스스로 식물이 됨으로써 겨우 지켜낸다.
그리고 이처럼 주류의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마멸 되어가는 여성 등 소수 자들의 존재성이 거대한 국가 폭력을 만났을 때 어떻게 자기를 보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들이 바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그리고 이 소설들은 하나의 장편 서사라기 보다는 몇 개의 작은 서사들의 연쇄로 이어진다. 그것은 객관적 진리에 의해서는 보증될 수 없는 ‘미숙한 주체’들의 산문형식이다. 하지만 그 ‘미숙성’에서 새로운 언어가, 형식이, 사상이 탄생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소설은 이런 형식들이 대세를 이루고 그 대부분이 젊은 여성작가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오래도록 민족 민중 계급 등으로 표상되어온 한국문학의 고질적 남근주의, 가부장주의에 대한 집딘적 반란이라 할 수 있으며 나는 이것이 어느덧 21세기 한국소설의 주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이러는 가운데, 한강은 1970년생으로 당대 주류 한국 소설의 리더, 맏 언니의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노벨문학상 위원회는 우연인지 모르나 한강의 이러한 문학적 위상을 귀신같이 알아채서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다. 고맙고 기쁜 일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가지는 의의이다. 아마도 한 10년 후를 전후해서 한국은 다시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영광의 기록이 아니라 고통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토록 사람들을 들들 볶아서 유지되는 한국 사회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역량이 충분히 확대 재 생산될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시간의 흘러감을 목격하거나 실감(實感)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별과 무너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순식간에 없어져 마침내 그 실체가 없다. 온갖 사물이 신속히 변화하고 시시각각 바뀌기에 경전에서는 그것을 꽃잎에 맺힌 이슬, 쏜살같이 흘러내리는 산골짜기의 물, 견고하지 못한 모래땅에 비유한 것이다.
더운 김이 모락모락 조금씩 피어 오르는 한 공기의 밥을 보고 시인은 시간의 흘러감을 감득한다. 항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또한 견실성(堅實性)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이 시를 소개한 문태준 시인은 이 시를 읽고 다음의 경구를 떠올렸다고 한다. “물은 흘러 언제까지 차(滿) 있지 않고, 타오르다 머지않아 꺼지는 불 꽃.” 찰나생멸(刹那生滅)하니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는 거다.
한강 작가 최근 한 공식 석상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한다. "담담한 일상 속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쓰고 싶은 소설을 마음속에서 굴리는 시간이다. 아직 쓰지 않은 소설의 윤곽을 상상하고, 떠오르는 대로 조금 써보기도 하고, 쓰는 분량보다 지운 분량이 많을 만큼 지우기도 하고, 내가 쓰려는 인물들을 알아가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노력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내가 나름으로 성실히 살아내려 애썼던 현실의 삶을 돌아보면 마치 한 줌의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 짧게 느껴지는 반면, 글을 쓰며 보낸 시간은 마치 삼십 년의 곱절은 되는 듯 길게, 전류가 흐르는 듯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네 일상의 흐트러짐을 잡아 주는 좋은 이야기이다. 아침 마다 쓰고 싶은 글을 마음에 굴리는 시간이 나도 매우 행복하다. 그때 시간은 멈춘다.
지난 30년 동안 그녀의 삶은 마음 속에서 굴리는 일을 포함해서 집필에 바쳐졌다. 그렇게 폭력에 맞서는 문학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폭력은 결국 사랑으로 극복됨에 도달했고, 가해자와 피해자. 과거와 현재를 화해시키는 책을 써낸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쓰고 싶은 소설을 마음속에서 굴리는 시간입니다. 아직 쓰지 않은 소설의 윤곽을 상상하고, 떠오르는 대로 조금 써 보기도 하고, 쓰는 분량보다 지운 분량이 많을 만큼 지우기도 하고, 제가 쓰려는 인물들을 알아가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노력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설을 막상 쓰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길을 잃기도 하고, 모퉁이를 돌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들어설 때 스스로 놀라게도 되지만, 먼 길을 우회해 마침내 완성을 위해 나아갈 때의 기쁨은 큽니다." 이게 진짜 기쁨이라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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