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일지] 이처럼 사소한 것들
대구 강의를 가면서, 기차에서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라는 짧은 소설을 읽었다. 진한 감동이었다.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선택 앞에서 고뇌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낸 소설이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표현을 빌리면, "안락과 몰락을 가르는 것은 더 없이 연약한 경계"임을 알게 해준 소설이었다.
"수월한 침묵과 자멸적 용기의 갈림길, 그 앞에 움츠러든 한 소시민을 둘러싼 세계"(신형철)를 길게 말하지 않고, "키거니안 엔딩"(신형철)이 인상적이었던 소설이다.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반전이 아니라, 감히 기대해도 될까 싶은 일이 실현되는 끝맺음 이었다. 그것은 날마다 기계적으로 전개되는 일상에 복무하는 한 사람이 일상을 멈추고, 자신을 뒤돌아보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순간이었고, '가족 인간'이기를 멈추게 했던 선택이었다.
소설의 한 문장을 공유한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p.29)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 살면서, 예기치 못한 일과 마주하고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조금 더 용기 내어 행동하고 싶다.
-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 좀 더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하고 싶다.
- 내가 만난 좋은 것들을 되도록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페이스 북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만났다. 공유한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남자가 차를 타고 퇴근을 하다, 도로 가에 서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발견했다. 석양이었지만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는 할머니의 메르세데스 차 앞에 자신의 차를 세우고 다가갔다. 남자의 낡은 차는 여전히 덜컹거리고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에는 친절한 웃음을 띄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매우 걱정스러웠다. 한 시간 동안 아무도 차를 세우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혹시 나를 해치려는 건가? 넉넉해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배고픈 것 같은데, 어쩐지 좋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할머니가 추위에 떨면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쩌면 추위 때문에 두려움이 커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따뜻한 차 안에 들어가 계시는 게 어떨까요? 아, 제 이름은 브라이언 앤더슨입니다."
그리고 차를 살펴보니, 타이어 하나가 펑크나 있을 뿐 다른 이상은 없었다. 브라이언은 장비를 가지고 차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이내 그는 타이어를 쉽게 교체했지만, 손이 더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날이 추운 탓인지 몇 군데 상처가 남았다.
그가 새 타이어의 나사를 조이고 있을 때, 차 안에 있던 할머니는 차창을 내리고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자신은 세인트 루이스에 살고 있고, 이 마을을 통과하는 중이었다고. 그러면서 그의 도움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브라이언은 할머니의 차 트렁크를 닫으면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그에게 얼마를 주면 될지 물었다. 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떤 끔찍한 결과를 낳았을 지 눈에 보였기 때문에 어떤 액수라도 줄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돈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타이어를 교체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 쉬운 일이었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운 것 뿐이니 말이다. 게다가 과거에 그 역시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다른 식의 삶은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그는 할머니에게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정 갚고 싶다면 다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을 도와주면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저를 생각해주세요." 그는 할머니가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에게는 사실 춥고 힘들었지만, 해질 녘 황혼을 헤치며 집으로 가는 길에는 기분이 좋았다.
할머니는 몇 킬로미터 정도 지났을 무렵에 길가에 있는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그녀는 아직 한기가 남아 있는 몸을 덥히고 집에 도착하기 전 간단히 요기라도 할 겸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는 주유기 두 대가 세워져 있고, 내부 역시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 않는 카페의 모습이 그녀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할머니의 머리가 젖어 있는 것을 본 웨이트리스가 그녀의 테이블로 다가와 깨끗한 수건을 건네 주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서 있었던 탓인지 매우 피곤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할머니는 웨이트리스가 족히 임신 8개월은 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도 그녀가 여전히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렇게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어떻게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걸까?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좀 전에 만났었던 브라이언을 떠올렸다.
식사를 마치고, 할머니는 계산을 하겠다고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웨이트리스가 거스름돈을 가지러 간 사이 할머니는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웨이트리스는 할머니가 어디로 간 걸까 생각하다가, 할머니가 식사를 마친 테이블 위에 무언가 적힌 냅킨 한 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냅킨에 적힌 글을 읽으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냅킨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당신은 내게 빚진 게 하나도 없어요. 나 역시 그 입장에 있었거든요. 누군가 나를 도와 주었고, 나 역시 그대로 당신을 돕는 것 뿐이에요. 만약에 내게 되갚고 싶다면 이렇게 해요. 이 사랑의 연결 고리가 끝나지 않게만 해줘요."
냅킨 아래에는 100달러짜리 지폐가 네 장 더 있었다. 여전히 치워야 할 테이블과 채워 넣어야 할 설탕 그릇과, 서빙 해야 할 손님들이 많았지만 그녀는 하루 일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면서 그녀는 할머니의 메모와 그녀가 받은 돈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떻게 나와 남편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걸 알았을까? 다음 달이 출산 예정일이라서, 돈이 매우 필요했는데. 남편 역시 걱정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옆에 잠들어 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키스하면서 이렇게 속삭였다. ‘'다 괜찮을 거야. 사랑해, 브라이언 앤드슨.’' 그녀의 남편은 바로 그 할머니의 차를 수리해준 브라이언이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다'는 말처럼 이 이야기는 우연을 빌어 돌고 도는 사람 사이의 친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다 읽고 난 후와 비슷한 감동이 밀려왔다.
오늘 아침 사진은 강의 중간에 길 가의 한 벤치에서 만난 하늘이었다. 단풍은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 것이 아니라, 초록의 생명이 마지막 열정으로 뿜어낸 절정의 환희일 것이다. 노년도 저 금빛의 풀밭과 단풍 든 나무들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러니 늙는 것을 서러워 말 일이다. "가만히 오므린" 단풍 손이 가을에 지친 하느님과 나를 '뜨겁게' 받아 모시겠다고 말한다.
단풍/박현수
떨어진 불꽃은
손아귀를
가만히 오므린다
다음에는
하느님이 떨어질 차례란 듯이
서울대 한숭희 교수에 의하면, "한 권의 소설이 주는 교육적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은 한국 사회를 단번에 ‘문학 학습’의 열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좋은 교사는 한 반 아이들을 공부하게 만들지만, 좋은 작가는 그 책을 읽는 한 사회를 공부하게 만든다"고 했다.
문학은 인간의 실존적 문제상황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표'를 던지게 해 주며, 존재와 인식 속 깊이 잠재된 질문들을 꺼내어 정면으로 응시하게 해 준다. 이런 문제들은 때로는 너무나 무겁고 아파서 결코 제대로 응시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작가들은 이런 치열함을 누구보다도 먼저 경험하며, 결코 피하지 않는다.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 한강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경험, 감정, 나의 인간에 대한 질문, 모든 회의와 의심들, 그런 것들로 부터 도망하면 좋죠. (하지만) 다시 오면 그대로 있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대결을 해야 되는 거예요. 너무 힘들죠. 대결하기 싫죠. 그래도 해야 되잖아요.” 한강의 작품 뿐만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쓴 좋은 글들은 자신만의 정면승부를 통해서 표현해낸 아픔과 두려움을 독자들도 치열하게 경험하도록 밀어붙인다. 그 속에서 날 것으로 서의 그 아픔이 그대로 독자들에게 공명되도록 하는 탁월한 능력을 표현한다. 단어와 문장들은 직접 보고 듣는 것보다 훨씬 더 세밀하게 살과 뼈를 쪼갠다. 이런 것을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기차 안에서 읽으며 공감했다.
이 소설 주인공 펄롱 옆에는 알게 모르게 이웃에게 선한 영향과 도움을 주었을 미시즈 윌슨, 일상을 공유하며 서로를 돕고 현실 조언을 하는 미시즈 케호, 부정과 반인륜적 행동을 숨긴 채 위선과 성스러움으로 포장한 수녀원이 나온다. 이 같은 이웃 역시 내 주변에도 존재한다.
우리 같은 소시민은 주인공 펄롱 같다.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 하루 벌어 하루를 버틸 수 있으면 기적이다. 다른 사람에게 동전 한 닢, 마음 한 켠이라도 내주는 것도 사치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 가운데 살아 남겨야 할 것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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