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일지] 길이 끝나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
올해가 갑진년이다. 음력으로 하니까, 아직은 좀 남아 있다. 갑진년의 갑(甲)이 지닌 동쪽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작을 상징하며, 청색은 푸르름으로 건강미 넘치게 새로이 시작하는 역동의 모습이다.
물론 새로 시작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지닐 수 있지만, 그래도 떠오르는 해처럼 희망을 품고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기존의 질서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 계묘년이기 때문에 갑진년에 변화를 두려워하고 기존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만 집착하면 향후 10년의 미래에 뒤처질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진(辰)은 오행으로 '토'에 해당하며 천간 목(木, 나무)의 기운인 갑(甲) 목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지지기반이 되기도 하고, 감(甲) 목(木) 입장에서는 진(辰) 토(土)를 경작하는 '소토(燒土)'의 의미도 지닌다. '소토'란 경작의 의미로 새로운 농사를 짓기 위해 불을 지르고 밭을 갈아엎는 것이다. 즉 유행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기반을 만들고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면에서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농사를 망칠 수 있다는 의미다. 새로운 10년의 시작을 꿈꾸어 보는 것이 2024년 갑진년 푸른 청룡의 해다. 더불어 지난 것들을 털어버리고 소토하여 밭을 새롭게 갈아엎는 수고를 필요로 한다. 그런 해를 우리 맞이하여 지내왔고, 이젠 얼마 남지 안 했다.
동아시아 철학에서 갑(甲)은 10개의 천간 중에서 첫 번 째로 시작을 의미한다. 즉 갑진년은 10년을 계획하고 새로 시작하는 해다. 새로 시작하는 것은 기존의 것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리뉴얼보다는 부수고 새로 짓는 리빌딩의 의미가 강하다. 힘찬 용띠 해 아침, 경제 전문가들은 2024 한국 경제를 ‘용문점액(龍門點額)’이라는 다소 유보적인 키워드로 예측했다(대한상공회의소 조사).
‘용문’ 아래 물고기가 뛰어올라 문을 넘으면 용이 되지만, 넘지 못하면 문턱에 이마를 찧고 떠내려간다는 뜻이다. 올해가 우리 경제의 미래를 가를 변곡점이라는 이야기인데, 한 발만 삐끗하면 '용'이 아닌 '이무기(상상의 동물로 용이 되기 전 상태의 동물)' 신세일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실제로 우리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치를 생각하니, ‘항룡유회(亢龍有悔)’란 말이 떠오른다. 하늘 끝까지 올라가 내려올 줄 모르는 용은 반드시 후회할 때가 있으니, 높은 지위에 올라 겸손과 소통을 모르면 실패를 면치 못한다는 의미다. 용산(龍山)의 '용'이든, 지역의 '용'이든 국민 앞에 나서서 권력을 부리는 자들이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항룡(亢龍)’은 물속의 ‘잠룡(潛龍)’에서, 세상에 나오는 ‘현룡(見龍)’, 비상하는 ‘비룡(飛龍)’을 거쳐 더는 오를 곳 없이 올라간 단계다.
전통 사찰에 가면 대웅전 처마 끝에 용머리가 종종 보인다. 불교에서 용은 고통의 바다(苦海)인 현실 세상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으로 건너게 해주는 영물로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는 배의 역할을 한다. 대웅전 앞에는 용머리가 있고 뒤에는 용꼬리가 있어서 대웅전 법당 자체가 하나의 배를 의미하며 그 배를 타고 고해를 건너 피안으로 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어떤 사찰은 법당 앞에 놓인 계단 입구에 용머리가 조각돼 있다. 더불어 뒤쪽에도 용꼬리가 조각돼 있고 법당을 포함한 그 전체 마당까지 모두 배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용은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듯이 고해인 현실 세계에서 피안으로 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의미가 무속 신앙으로 들어가서 굿의 마지막에 배가 나타나며, 그 배에 영혼이 타고 극락으로 간다는 의미로 '용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용'은 동아시아의 생활이나 의식 속에서 무한한 긍정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이는 'Dragon'이라 불리는 서양의 '용'과는 완전히 다르다. 동양의 ''용은 수호신이며 물을 관장하고 농사에 필요한 비를 적절하게 뿌려주는 인간에게 이로운 상징인 반면, 서양의 '용'은 인간을 괴롭히는 괴물의 상징이다. 서양에서 어둠과 악의 상징인 '용'을 퇴치하면 영웅이 되는 반면, 동양에서는 정의와 수호의 상징인 '용'의 보호를 받으면 영웅이 되었다.
이렇듯이 '용'의 보호를 받은 영웅은 다시 '용'처럼 백성을 이롭게 해야 하는 숙명을 지니게 된다. 그렇게 '용'은 임금을 상징하게 되었다. 왕은 군림하기보다는 '용'처럼 무궁한 능력으로 승천하여 하늘에 오르지 않고 백성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변화무쌍과 천변만화는 '용'의 능력을 표현하는 용어다. '용'들 중에서 가장 젊은 '청룡'은 늙은 '항룡'보다 더욱 생동감 넘치기 때문에 더욱 변화무쌍하다. 갑진년 '청룡'은 더욱 변화가 심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용산'은 끝났다. 지난 7일에 있었던 기자회견을 보니, '청룡'이 아니라, "유회(有悔)'만 있는 '항룡(亢龍)'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7일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은 ‘이럴 거면 뭐 하러 했나’라는 반응을 자초한 자리였다. 국민에게 죄송하다며 사과했지만 무엇을 사과하는지 알 수 없었고,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윤 대통령 부부-명태균씨 관련 의혹 등 현안에도 무엇 하나 명쾌한 설명이 없었다. 자신의 억울함 토로와 자화자찬으로 140분을 채운 윤 대통령에게 더 이상 어떠한 기대도 걸 수 없게 됐다.
앞에서 이 얘기 하고, 뒤에서 저 얘기하는 대통령의 당당한 몰염치에 치가 떨린다. 유체이탈과 뻔뻔함, 그리고 부인에 대한 사랑만이 나뒹구는 국가 최고통치자의 기자회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여튼'이었다. 그래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하여튼' 대통령이라는 거다. 그의 기자화견에서 '하여튼'이란 말은 총 66번 나왔다 한다.
대통령이 선호한다는 "국어사전 정의"에 따르면 '하여튼(何如튼)'은 "의견이나 일의 성질, 형편, 상태 따위가 어떻게 되어 있든"을 의미하는 부사다. 대통령은 자신과 관련된 의혹 제기에 대해 답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하여튼'을 쓴다. 조금 박절하게 말하자면 '아 됐고'의 느낌으로 들린다. 이런 언어 습관은 뭔가 일을 급하게 마무리하려는 심리, 잘못된 걸 지적할 때 변명거리를 생각해내는 심리와 연관돼 있다. 뻔하게 드러난 사실들을 앞에 두고 '하여튼 잘 하겠다'를 남발하는 건 성의없음으로 보여진다.
정권 초기부터 알아봤다. 그 뻔뻔스러움을. '바이든-날리면' 사태는 윤석열 정부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사건이자, 대한민국 언론 자유의 핵심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 국민이 보고 들은 영상과 육성이 존재하는데도 뻔뻔하게 '미국 국회가 아니라 한국 국회'라고,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윽박지르며 소송전까지 불사한다. 지록위마(指鹿爲馬)를 뻔뻔하게 구사한다. 원래는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였다.
기자회견을 요약하면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실제 '김영선이 해 줘라'는 말을 했더라도 '의견 제시' 수준이라는 거다. 이는 피의자식 화법이라 한다. 김용남 전의원은 "더듬수'라 했다. "검사 앞에 선 피의자가 일부러 바보 행세를 하면서 혐의를 부인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란 지적이 나온다. 검사 출신인 김용남 전 의원은 이를 '더듬수'라 표현했다.
쉽게 말해 '나는 바빠서 그런 일이 있는지 기억을 못하고, 설사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있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며,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설령 그런 행위를 했더라도 공모에 가담했다는 나의 혐의는 성립하지 않아요'라는 장황한 피의자식 화법이란 것이다." (박세열 기자) 수사의 프로토콜은 '이익을 본 자'를 족치는 데서 시작한다. 그가 어떤 이익(김영선 공천)을 봤는지 확정해야, 그 이익에 대한 대가(무상 여론조사)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더듬수'를 구사하는 용의자를 잡는 방법이라 한다.
가수 이승환은 다음과 두 줄로 요약했다. "어… 쫌… 하여튼… 뭐… 쓰읍… 엉… 저… 반말 찍찍… /어쨌든 사과는 하지만 뭘 사과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 엉.. 뭐.. 쫌… 끄억… 하여튼… 가짜뉴스… " 사람은 안 바뀐다. 기대할 필요가 없다. 고쳐 쓰지 못한다. 그냥 바꾸어야 한다.
길이 끝나면/박노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 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오늘 아침 내 머리를 맴도는 것은 '그릇 론'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영복 교수는 자신의 책, <<담론>>에서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된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뜨리고 일을 그르친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 ‘70%의 자리’를 권한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그릇 론'이라 한다. “30 정도의 여유, 30 정도의 여백이 창조의 공간이 된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 받는 자리에 가면 어떻게 될까?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 난다.” 또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자리와 관련해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의 권능을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주역>>은 효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경우를 ‘득위’라 하고, 잘못된 자리에 가 있는 경우를 ‘실위’라고 한다. 득위는 아름답지만 실위는 위태롭다. <<주역>>의 핵심은 관계론이다. '길흉화복'의 근원은 잘못된 자리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내가 있는 '자리', 즉 '난 누구, 여긴 어디'를 묵상하며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어떤 '직위(職位)'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 속에서 나의 위치까지 확장되는 용어이다.
한문으로 하면 '위(位)'이다. <<주역>>에 따르면, 제자리를 찾는 것을 득위(得位), 그렇지 못한 것을 '실위(失位)'라 했다. 득위는 만사형통이지만, 실위는 만사 불행의 근원이다. 잘못된 자리는 본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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