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성 산중서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 1 >

김홍성 승인 2024.11.24 17:59 의견 0
김홍성 시인,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김홍성 산중서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 1 >

1993년 5월 8일, 오후 4시 경 인천을 떠난 여객선 'WEIDONG FERRY GOLDEN BRIDGE'는 5월 9일 오전 11시에 승객들을 웨이하이(威海)에 내려놓았다. 산둥반도 끝에 있는 항구 도시 웨이하이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먼지가 날렸다. 자전거와 수레 달린 자전거들이 달렸다. 나는 대합실 앞에 나와서 쪼그리고 앉아 우리의 짐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짐이 많았다. 중국과 티베트에서 3개월, 파키스탄에서 1개월, 최소한 4개월 일정의 여행이라서 식량과 장비가 만만치 않았다. 짐 중에는 된장 고추장이 한 상자, 라면이 두 상자, 그리고 19공탄 만한 두루마리 휴지도 한 상자나 있었다. 일행 중 연장자인 박씨(당시 43세)가 2년 전인 1991년에 중국 여행 중에 먹어본 음식이 대체로 입에 안 맞았으며, 가는 데마다 화장실 휴지를 못 구해 고생이 많았다는 얘기를 듣고 구입할 목록에 올렸던 물품들이었다.

숙소를 물색하러 간 박 씨와 최 씨(당시 39세)가 웬 아주머니 한 분과 함께 돌아왔다. 암달러를 취급하는 조선족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환전 뿐 아니라 자기 집에서 민박도 가능하다고 했다. 순박해 보이고 말이 통하는 올해 40세의 봉이 엄마는 작년에 셴양에서 이사 왔다고 했다.

봉이 엄마의 집은 중국은행 뒷골목에 있는 13평 규모의 아파트다. 거실과 안방, 좁은 베란다와 부엌에 딸린 다용도실, 그리고 수세식 화장실에는 샤워 꼭지도 달려 있었다. 방들은 생각보다 어수선했다. 베란다에는 여자들의 속옷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고 거실의 침대 옆에는 짐 보따리들이 그득했다. 우리가 쓰기로 한 안방에는 서랍식 이중 침상이 있고 벽에는 여자들의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베란다 쪽 벽에는 홍콩 제 고물 전자 오르간과 비디오도 떡하니 놓여 있었다.

봉이 엄마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젊은 여자 둘이 들어왔다. 잠시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들은 우리 때문에 다용도실을 임시 숙소로 사용하게 된 인근의 밥집 겸 술집의 복무원(종업원)들이었다. 그녀들은 한국 가수들의 흘러 간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우리가 자는 체하고 있는 거실을 통해 베란다로 가서 빨래를 걷어 오기도 했다.

이 집에는 그녀들 외에도 많은 조선족들이 드나들었다. 대부분 북만주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돈 벌러 온 조선족들이었다. 봉이 엄마에 의하면 중국 인민은 아무데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각자 알아서 벌어먹고 살아도 괜찮다는 법이 생긴 작년 이래로 많은 조선족들이 고향을 떠나 객지로 나섰다는 것이다.

봉이네 부부도 작년 초에 시아버지와 남매를 셴양에 두고 웨이하이로 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한약 장사, 베 장사 등을 하다가 돈이 조금 모이자 아파트를 세내어 민박도 치고, 암달러도 취급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두 집 살림을 하자니 부부가 같이 벌어도 벅차기는 매일반이라고 했다.

봉이 아빠는 다른 도시로 출타 중이었다. 지금은 통역과 안내를 업으로 하지만 과거에는 교사였고 이곳 웨이하이에서 해군으로 복무한 적도 있었다.

봉이 엄마는 홍위병 출신이라고 했다. 15세 나던 해부터 20세까지, 한창 공부할 나이에 홍위병을 쫒아 다니느라고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고 했다. 당시에는 정치 성적만 좋으면 대학 입학이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녀 때 이미 공산당원이 된 봉이 엄마도 꼭 대학에 가는 줄만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덩샤오핑 (鄧小平)이 집권하면서 그녀의 대학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봉이 엄마와 함께 시내로 냉면을 먹으러 갔다. 번듯한 현대식 건물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새로 건물을 짓느라고 공사 중인 곳도 아주 많았다. 봉이 엄마는 이곳 웨이하이가 중국에서도 손꼽을 만큼 깨끗한 현대식 도시 임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공원 근처의 조선 식당에서 냉면을 먹었다. 사리는 고무줄처럼 질기기만 하고 육수는 짜고 달았다. 냉면 속에 배 대신에 토마토를 썰어 넣은 것이 흡족치 않았다. 삶은 게와 조개도 좀 먹어 보았지만 맛은 신통치 않았다.

우리는 해안가로 갔다. 가면서 한글로 쓴 간판을 많이 보았다. 대구 술집, 서울 주점, 미아리 밥집, 춘양집, 서울궁 가라오케 등이었다. 그런 집 앞에는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서 있었다. 산골에서 금방 왔다고 느껴지는 순박한 모습의 아가씨들도 있었지만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 아가씨들도 많았다. 껌을 씹기도 하고, 야릇한 눈길을 보내기도 했던 그 아가씨들은 어느 민족일까 궁금했다.

어떤 건물에는 국제결혼상담 통역 등의 안내문을 붙여 놓기도 했다. 모시, 삼베, 정력제, 산호, 비취 등 취급 품목을 한글로 크게 써서 내건 상점들도 많았다. 그 품목들은 아마도 한국 관광객들에게 가장 많이 팔리는 물건들일 것 같았다.

안경 시장 이라고 불리는 상설시장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상품들은 모두 보잘 것 없었다. 옷, 구두, 화장품, 장신구, 색안경 등등 우리나라 시골 장터에서나 간신히 볼 수 있는 공산품들이 나와 있었지만 그나마 귀한 것이라는 듯 좌판마다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빵이나 떡, 과자, 여러 가지 색소를 듬뿍 넣은 사탕, 튀기고 굽고 찌고 하는 각종 음식을 파는 리어카에도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 시장 골목의 공설 운동장 철문에는 ‘복무원 모집’이라는 서툰 한글로 된 구인 광고가 붙어 있었다. 가라오케에서 일할 18-22세 사이의 용모 단정한 아가씨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봉이 엄마를 먼저 들여보내고 공원에서 어정거리고 있자니 아까부터 우리 주변을 배회하던 처녀 두 명이 말을 걸었다. 짐작대로 조선족 처녀들이었다. 똑같이 빨간 바지를 입었고, 빨간 조끼 밑에 흰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이 처녀들의 얼굴은 좀 마른 편이고 피부는 거칠었다. 분을 발랐고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지만 농촌 출신 아가씨들이 분명했다.

말씨에 어딘지 모르게 경상도 억양이 느껴지는 수줍은 아가씨들. 헤이룽장성에서 한 달 전에 왔다는 그녀들은 헤어질 때쯤에야 자신들은 가라오케에서 일한다고 실토했다.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건 무료지만 월급은 없다고 했다. 손님이 주는 팁이 수입의 전부라고 했다.

저녁 먹고, 낮에 만난 아가씨들이 일한다는 가라오케를 찾아갔다. 붉은 조명등이 켜진 조그만 홀이 있고 홀 정면은 일종의 스탠드바였다. 우리가 들어서자 긴 탁자에 기대어 서 있던 낮의 그 아가씨들이 하면서 반색을 하면서 ‘안 오시는 줄 알았다’고 했다.

사실 우리는 그녀들을 만나러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한참 의논했었다. 수십 년 헤어져 살아온 만주의 동족들, 일제의 수탈에 저항한 항일 열사의 손녀일수도 있는 아가씨들 아닌가. 불과 얼마 전까지는 북만주의 농촌에서 김을 매던 순박한 아가씨들과 그런 유흥가에서 팁을 주고받는 관계로 만나는 일이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취재의 일환이다. 유흥을 위해서 만나는 게 아니다. 치부를 들추자는 것도 아니다. 지금 여기 중국 땅에 사는 우리 동족의 실상을 구석구석 체험해 보자는 거다.”

설왕설래 옥신각신 끝에 우리는 그런 결정을 내렸었다.

아가씨들은 우리를 홀 왼쪽의 또 다른 문 안으로 안내했다. 비좁은 통로 왼쪽에 조그만 방 네 개가 나란히 있었다. 그 중 제일 끝 방에 들어갔다. 그 방은 조선족 아가씨들보다 훨씬 선임인 한족 아가씨의 방이라고 했다. 둘이 누우면 꽉 찰 것처럼 비좁은 방이었다. 한족 아가씨까지 세 아가씨와 우리 셋이 서로 무릎을 맞대어야 둘러앉을 수 있었다.

아가씨들 앞에는 깡통 콜라, 우리 앞에는 깡통 맥주를 하나씩 놓았다. 상 가운데는 바나나 등 과일을 놓았다. 중국 아가씨가 중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뜻의 중국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제각기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조선족 아가씨들은 어느새 배웠는지 한국 가수들의 흘러간 유행가를 열심히 불렀다. 조선족들이 즐겨 부르는 가요를 아가씨들에게 부탁했다. 아가씨들은 서로 의논하더니 다음과 같은 노래를 각각 한 곡씩 불렀다.

떡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떡가루 날렸느냐 하늘에 눈 내리네

이쁜이가 가는 길 시집가는 길

하얀 너울 쓰고 간다

령길에 눈 내리네

아아 송이송이 하얀 눈이

산에도 들에도 소복이 내렸네

첫 곡의 제목은 ‘이쁜이 시집가네’라고 했다. 다음 곡은 ‘원앙새’였다.

나비가 꽃송이를 찾아왔느냐

꽃송이 나비를 눈짓했느냐

나비처럼 끔찍한 신랑이고요

꽃처럼 아름다운 신부라에

눈이 맞은 원앙새 마음도 서로 맞추어

첫날 언약 백년을 지켜 가세나

노래들을 부르고 나서 그녀들은 ‘재미 없지에’라고 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무미건조한 노래였다. 기껏해야 신랑 신부의 결혼 축가에 불과한 노래지만 그때 거기서는 이상한 감동이 있었다. 이 처녀들이 장차 결혼 하여 다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을지 걱정 되었다. 아직은 순박해서 접대가 서투르기 짝이 없지만 머지않아 눈 가리고 코 베는 기술까지 배우게 될 지 누가 아는가.

우리는 그 방에서 두 시간 동안 놀았다. 조선족 아가씨 둘은 맥주를 한사코 사양하고 콜라만 마셨다. 콜라도 중독이 되며 몸에 좋지 않다고 말했지만 ‘참말 맛 있어에’하면서 콜라만 홀짝였다. 그래도 한족 아가씨는 맥주를 몇 잔 받아 마셨다.

홀에서는 한 남자가 가라오케 반주로 한국 가요를 멋들어지게 불렀지만 우리는 방에서 반주 없는 노래를 합창했다. ‘두만강 푸른 물에’와 ‘나의 살던 고향은’등이었다. 서글펐다. 중국에 도착한 첫날밤에 동족 처녀들과 가라오케에 앉아서 흘러간 노래를 부르며 감상에 젖어있는 내 모습이 가련하고 싫었다.

11시가 되어갈 무렵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에 들어 온지 곧 2시간이 넘어가는데 그렇게 되면 대실료를 추가로 부담해야 된다고 아가씨들이 말해 줬기 때문이었다.

계산서가 왔다. 깜짝 놀랐다. 깡통 맥주 여남은 개 마시고 안주 몇 접시 먹었는데 봉사료 3백 원을 포함하여 중국 돈으로 9백50원. 운봉이네 집에서 우리 세 사람 하루 먹고 자는데 1백 원이 채 안 되는데 비하면 큰돈이었다.

- 자본주의식으로 놀았으니 자본주의 시세로 계산하자는 거겠지…….

- 우리 돈으로는 약 8만 원이니까 비싼 것도 아니지…….

하지만 바가지를 쓴 건 분명했다. 중국 돈 9백50 원은 당시 일반 회사원의 3-4개월 치 월급에 해당된다고 들었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길모퉁이에서 만난 여자들이 서툰 조선말로 가라오케에 가자고 유혹했다. 우리가 대꾸 없이 한참을 걸어가다가 돌아보니 그 여자들은 여전히 그 건물 모퉁이에 서 있다가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가 상상했던 중국은 결코 그런 곳이 아니었다. 묵묵히 앞서 걷던 박 씨가 씁쓸하게 말했다

“이렇게 변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2 년 전만해도 이런 분위기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여기가 항구라지만 정말 덧없네요”

저작권자 ⓒ 더코리아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