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일지] 일을 도모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11월의 마지막 날 아침 시는 오세영 시인의 <11월>이다. 11월 달력을 떼어내자 12월 한 장만 남는다. 벽에 걸 때만 해도 곳간에 그득한 양식 같던 한 해가 어느새 다 지나갔다는 회한에 젖는다. 회한은 반성과 자책으로 이어진다. 연초에 세운 목표는 달성했는지, 잘못한 거나 아쉬웠던 건 없는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11월은 거울 앞에 선 나를 마주하는 달이다.
어쨌든 시간이 참 빠르다.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세월을 두고, 장자는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 했다. 그는 우리의 삶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사는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흰 망아지가 벽의 갈라진 틈새를 내달리며 지나치는 순간 정도다. 홀연할 따름이다!"(<<장자>> 외편 <지북유>)고 했다. 이를 간단히 우리는 "백구과극"이라 한다. 우리의 삶이 "마치 흰 망아지가 벽의 틈새를 지나치는 순간"이라는 백구과극이 실감나는 아침이다.
시간은 '나는 것'이 아니라, '내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시간이 나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 하지만 시간은 내는 것이기도 해서, 그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냈다가, 힘들게 비웠던 그 시간이 가득 채워졌던 경험은 행복하다. 행복의 비밀은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지금-이 순간을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다. 올 한 해도 다 갔다고 후회하지 말고, 남은 한 달을 걱정하지 말고, 오늘 11월 말일 하루를 즐겁게 사는 거다. 너무 완벽하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 거다. 그러면서 그냥 "시들어 썩기"보다 시간을 내는 거다. 가는 11월이 아까워 11월 말일이 되면 늘 공유하는 시이다.
11월/오세영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선택한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생각을 바꾸면, 지금 힘들고 괴로운 일도 행복한 일로 바뀐다. 그때 중매 자가 감사하는 마음이다. 걸을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고, 집이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대구역과 대전역에 노숙자 몇 명을 보았다. 돈을 좀 주고 싶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면 니체가 미친 이유를 소환했다. '토리노의 말'로 알려진 일회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현실을 해석한다. 왜 그럴까 그렇지 않으면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현실 그 자체를 묘사하거나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굴지만, 파악된 현실에는 이미 자신의 관점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해석하지 않고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 주제 파악을 하라, 현실 파악을 하라는 말이 있지만, 그 누구도 해석 이전의 주제 파악이나 현실 파악을 해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석 이전의 현실이라는 게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만, 그런 걸 보고서 미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니체의 '토리노의 말'> 사건은 이런 거였다. 1889년 1월 3일 니체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마부에게 채찍질 당하는 말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울부짖으며 말에게 달려간다. 말의 목을 감싸 안고 날아오는 채찍질을 막으려 든다. 바로 이 순간 니체는 미쳐버린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10년이 넘도록 그 광기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거다.
니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이 사건의 존재는 결코 실증된 적이 없다고 했다. 토리노 말 사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추정된 발발 시기보다 11년이 지나서야 등장하며, 그 기록조차 전해지는 풍문을 받아 적은 것에 불과하며, 과연 그때 광장에서 얻어맞는 말이 있었는지, 니체가 그 말을 보았는지조차 확증할 수 없다고 했다. 토리노의 말 사건은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거다. 그러나 그것은 강력한 이야기다. 해석을 부르는 강력한 이야기다.
문제는 다시 사회가 연구하는 ‘해석의 코드’를 거부하면, 광인(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 거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에 개고기는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는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였다. 소의 식용 도축은 불법이었고, 돼지고기는 오늘날처럼 보편화하지 않았다. 대개 닭이나 개를 먹었다. 그러던 한반도에 조선의 니체가 있어, 어느 날 아버지가 보신탕을 먹는 현장에 난입하여 울부짖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니체처럼, 그를 개 먹는 문화에 반기를 든 문화적 영웅이라고 간주해야 할까? 아마도 그는 광인 취급을 받았으리라. 난동을 부릴 때, 그는 공감이 넘치는 상태라기보다는, 개고기란 대상을 해석할 코드를 잃은 상태였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가 개고기가 음식이라는 당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해석 이전의 개고기 현실과 마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붉은 살점, '이게 도대체 뭐지'하다가 미쳐버리게 될지 모른다.
나는 작금의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 그냥 눈 감으면 되는데, <인문 일지>를 쓰면서 현실의 이면이 보인다. 보통 다른 사람들의 현실 해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혼자 미치는 거다. 그런데 바로 타협한다. "부쟁(不爭)의 철학"(노자, <<도덕경>>)을 마음의 근육에 장착했기 때문이다. 어제 대구의 마지막 강의에서도 많이 강조하고, 10회 강의의 결론으로 삼았다.
<<도덕경>>은 도(道)로 시작하여, 부쟁(不爭)으로 끝난다. 이를 연결 지으면 ‘도는 곧 부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쟁투(爭鬪)가 난무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피폐 되어 가는 험난한 시대를 살면서 내린 결론일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 전편을 통해 '부쟁(不爭)'을 강조하였다. "상선약수(上善若水)"로 시작되는 제8장에서는 "수선리만물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고 했고, 제22장에서는 "부유부쟁(夫唯不爭) 고천하막능여지쟁(故天下莫能與之爭)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의 어떤 것도 그에 맞서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제68장에서는 "선용인자위지하(善用人者爲之下) 시위부쟁지덕(是謂不爭之德) 사람을 잘 쓰는 사람은 스스로 아래에 거하니 이를 일컬어 부쟁지덕이라 한다"고 했고, 제81장에서는 "성인지도(聖人之道) 위이부쟁(爲而不爭) 성인의 도는 일을 도모하지만 다투지 않는다"는 말로 <<도덕경>>을 마무리하고 있다.
'부쟁'에는 노자 사상의 핵심인 "무위자연"과 평화, 공정이 응축되어 있다. 자연은 무위하고 다투지 않는다. 가을은 겨울을 이기려고 다투지 않고 겨울도 봄을 이기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 가을은 때가 되면 묵묵히 자신을 비우고 겨울에게 때를 넘겨주고 겨울 또한 때가 되면 따뜻한 봄을 위해 자신을 버린다. 다투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가을이 있고, 또 다른 겨울이 있게 된다. 각자의 분수와 영역을 지키면서 서로 다투지 않기에 세상은 평화로워진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가지면 분쟁(分爭)이 발생하지만 욕심을 비우면 '부쟁(不爭)'하게 되고 세상은 공정해 진다.
노자는 자신의 능력을 베풀고, 진리를 말하고, 깨달음을 전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한다. 그 성인은 자신의 가진 것을 자신의 울타리에 쌓아 놓지 않는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파멸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깨달음을 전하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큰 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잘 안다. 주었지만(與), 더 많아지고(多), 베풀었지만(爲) 더 갖게(有) 된다는 노자의 논리 속에는 쌓지 말고 베풀라는 성인의 삶이 있다. 통장에 돈을 쌓아 놓아도 내가 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통장에 찍힌 숫자와 금의 무게만큼 삶은 더 짓눌리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노자는 성인은 쌓아 놓지 않는 사람(聖人不積)이라고 정의한다.
특히 나는 노자 <<도덕경>> 제66장에 나오는 "선하(善下)"라 말도 좋아한다. 상대방 밑에 자신을 둘 줄 아는 거다. "부쟁의 지혜"이다. 나는 이 보다는 "앞서고자 하면 반드시 그 몸을 뒤에 두어야 한다"는 '겸양지덕'과 단순히 "부쟁(不爭, 싸우지 않음)"을 넘어서는 다양한 리더의 철학으로 읽었다. "부쟁"은 성공한 자의 신의 한 수라는 거다. "선하"는 과정이고 그 결과가 부쟁으로 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강(江)과 바다(海)가 깊고 넒은 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아래로(下) 흘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골짜기(百谷)의 물이 그 곳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노자는 부쟁의 철학을 주장한다. 상대방과 나의 손실 없이 부드럽게 이기는 방법이 노자가 원하는 승리 방법이다. 이를 박재희 교수는 "노자의 유약 승리법"이라 한다. 씨우지 않고 상대방의 가슴에 못박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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