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일지] 천지 자연은 무심하게 만물을 대한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부정(不淨)하기에 죽여도 되는 존재이지만, 지금은 사회적, 정치적 삶을 박탈당하고, 생물적 삶밖에 가지지 못한 존재로 사용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쓰던 말인데,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다시 사용하면서 알려진 단어이다. 그에 의하면, '호모 사케르'는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 없는 생명"으로 정의된다. 법의 영역에서 쫓겨나 법에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희생물로 바칠 수 없다는 것은 제사에 쓰일 수 없다는 것, 즉 신성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죽일 수는 있다. 그러니까 '살해한 자에 대한 사면'이 가능하다는 거다.
'호모 사케르'에 살해에 대해 면책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신성한 권리를 받았거나 스스로 신성하다고 여기는 소수의 기득권 집단이었다. 이들은 일반 대중에게 호모 사케르에 대한 살해를 허락하거나 부추기기도 한다는 게 더 큰 문제이다.
오래전부터 장애인이나 나환자들은 부정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된 '호모 사케르'였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이 소유한 노예의 팔다리를 자르고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이는 현대가 되어서도 형태가 바뀌었을 뿐 소수자에 대한 혐오감이나 약자에 대한 무관심으로 표현된다.
역사는 대중들의 자각과 연대에 의해 발전해 왔다. 대중들의 자각을 위한 인문학의 부재가 역사가 가끔씩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후퇴한다.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고 대중이 연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또 다른 '호모 사케르'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분명히 말하지만,' 호모 사케르화(化)'는 기득권의 무기이다. 과게 무고한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대중들에게 던져졌다. 이는 종교 권력의 신성함을 유지 하기 위해 '마녀'라는 호모 사케르를 만들어 냈다. 대중들이 마녀 사냥에 열을 올리는 만큼 종교 권력은 강화되었고 견제는 약화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보도연맹, 빨갱이로 낙인 찍힌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국민이되 국민이 아니었다. 그리고 성소수자, 장애인을 비롯해 수많은 사회적 약자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있다. 대중이 호'모 사케르' 사냥에 열중할수록 어떤 이들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인간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너무 짙게 깔려 있다.
가장 최근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공격하는 자들은 그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누군 가를 호모 사케르화하여 대중 앞에 내던진 것이다. 호모 사케르, 즉 부정한 존재이기 때문에 짓밟고 죽여도 괜찮으니 마음껏 돌을 던지라고 대중들을 부추기는 것이다. 기득권이 그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요인을 제거하는 오래된 방법이다. 게다가 그 '호모 사케르화(化)'의 문제는, 누구를 '호모 사케르'로 만들 건지 기득권들이 정하고, 또 만들 수 있는 이들이 이 사회의 진짜 권력자들이라는 거다.
이 문제에 대한 무관심이 계속된다면, '호모 사케르'가 되어 대중 앞에 내던져지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와 내 가족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심각하다. 그래서 혐오보다 연대가 필요하다.
그보다 먼저 우리들의 염치를 회복해야 한다. 염치(廉恥)라는 단어는 청렴할 염(廉)과 부끄러울 치(恥)라는 한자가 모여 만들어졌다. ‘염조(廉操)와 지치(知恥)’의 줄임 말로,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청렴하여 지조를 지키고(廉操), 수치심을 아는 것(知恥)인데, 흔히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한국 사회가 갈수록 염치가 없어진다. 개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가 그렇다는 말이다.
물컵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처럼 제도에 스며든 차별에서 혐오가 자란다. 사회에서 자라난 혐오는 구성원들의 인식에 퍼진다. 혐오의 대상은 움츠러들고, 인권은 무시된다. 불법이라는 낙인이 사람이라는 존엄성을 앞서간다. 법 밖으로 밀려난 이주민들은 이 공동체에서 자신의 권리가 보장받지 못할 것을 알기에 피해를 당해도 숨기 바쁘다. 법에서 정한 경계 안에서 삶을 붙들어 매고 있는 사람들도 삶을 담보로 건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법의 영역에서 쫓겨나 법에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불렀다. 한국에서 이주민은 합법이든 불법이든, 취업자격이 있건 없건 시민으로 살지 못하는 '호모 사케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노인들도 우리 사회에서 '호모 사케화(化)'되고 있다. 노인들이 ‘무쓸모 존재’로 낙인 찍히고, 교통 사고도 고령자가 내면 비난과 혐오를 한다. 노인 인구 비중이 느는 동안 한편에선 ‘노인혐오’ 논란이 커지고 있다는 거다. 2020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이 대표적이다. 노인들은 코로나-19에 가장 취약한 집단인 동시에 혐오와 폭력에 가장 많이 노출된 집단이었다. 노인들은 마스크 착용에 부주의하다는 이유로, QR 코드 출입에 서툴다는 이유로, 백신 접종을 두려워하고 기피한다는 이유로 눈총을 받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고립된 노인들이 폭력과 방임 등 정서적이고 신체적 학대를 당한다는 보고도 쏟아졌다. 재난 상황만이 아니다. 국민연금 재원이 고갈된다는 우려, 지하철이 적자에 시달린다는 지적이 나올 때마저 노인들이 현재 ‘누리는’ 제도가 시비의 대상이 됐다. 고령 운전자로 인해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온라인에는 비난과 혐오를 담은 표현들이 범람한다. ‘고령 운전자’라는 말은 어느새 연령으로 자격 조건을 선 긋는 혐오 표현처럼 쓰이게 됐다. ‘개개인의 신체 능력에 따른 차이’를 따져보자는 합리적인 목소리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좁다.
우리 사회는 강한 것을 갈망한다. 승리, 성공, 권력 등등. 나는 이런 강자들의 반대편에 있는 약한 것들, 가령 고요함, 익명성, 실패에 따라붙는 낙인, 이런 것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로 했다.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새는 제 아무리 보 잘 것 없는 참새라도 시간이 주어진 동안에는 열심히 살고, 때가 되면 아무런 자기 연민 없이 뚝 떨어져 버린다. 미련 없이 대지 위로 말이다."
낙인, 그거 무섭다. '오래된 낙인'을 생각하다.
미국의 한 흑인이 강간범이라는 부당한 누명을 쓰고 십 년 복역 도중 DNA검사에서 무죄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취직할 수 없었다. 무죄가 입증되었는데도 회사의 여직원들이 무서워서 그와 같이 근무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간첩조작 사건으로 고역을 치루다, 최근에 와서 무죄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그 '오래된 낙인'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나도 그럴까? 뇌리에 박혀온 고정관념의 단단한 껍데기를 깨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래서 붓다는 ‘여실지如實知’를 강조하신 것일 게다. '여실지'란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것이다. 그 반대가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이다.
몇 년 전에 해시 태그 기능을 이용한 성폭력 피해 고발이 전 세계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미투(#Me Too) 캠페인' 이었다. 성범죄는 피해 여성이 세상에 낙인 찍힐까 봐 두려워 침묵한다는 게 특징이라, 그간 당하 고만 있다가 여성들이 이런 편견을 깨고 나온 것이다. 여성들에게 보이는 '오래된 낙인'을 지워야 한다. 그래서 일부 남성들은 과거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을 고백하고 반성하는 '내가 그랬다(IDidThat) 캠페인'을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다.
악은 악마가 저지르는 게 아니다. 악이 저질러졌으니 그것을 행한 자에게 악마의 낙인이 찍힐 뿐이다. 독일계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친위대 대령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보고 유대인 학살을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저지른 측면에 주목했다. 그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매우 성실하고 근면한 공직자였다. 서류 정리는 늘 깔끔했고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했다. 그가 처리한 서류를 통해 약 40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됐지만 그에게 그것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충실히 이행한 것일 뿐이었다. 동기도 신념도 악의도 없었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이다.
'악의 평범성'은 국가나 종교, 진영, 조직 등의 명령이나 가치체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때 현실화한다. 그 싹은 우리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자랄 수 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해 근면성은 범죄가 아니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은 명백한 유죄임을 강조했다. 세상의 악은 인간이 악해서 저지르는 게 아니다. 그건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런 정치와 사회의 구조 악에 저항하지 않은 결과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의 시인은 살아생전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셨다는 ‘축구 등신’이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추구(芻狗, 짚 강아지)라는 걸 대학에 가서야 알았다고 한다. 등신은 나무나 돌, 쇠, 흙 등으로 사람의 크기와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신상(神像)인데, 지금은 ‘바보’라는 의미로 변했다. 추구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착하다 사람 좋다”는 말은 욕이라며 “모질고 독”하게 살라 당부한다. “할배랑 반대로만 살면” 된다는 것이다.
혼자만 착하믄 뭐하노/박제영
착하다 사람 좋다
그기 다 욕인기라
사람 알로 보고 하는 말인 기라
겉으로는 사람 좋다 착하다 하믄서
속으로는 저 축구(芻狗) 저 등신 그러는 기다
우리 강생이 등신이 뭔 줄 아나
제사 때 쓰고 버리는 짚강생이가 바로 등신인 기라
사람 축에도 못 끼고 귀신 축에도 못 끼는
니 할배가 그런 등신이었니라
천하제일로 착한 등신이었니라
세상에 두억시니가 천지삐까린데
지 혼자 착하믄 뭐하노
니는 그리 물러 터지면 안 되니라
사람 구실을 하려믄 자고로 모질고 독해야 하니라
길게 말할 게 뭐 있노
우리 강생이 그저 할배랑 반대로만 살면 되니라
하모 그라믄 되니라!
"추구(芻狗)"라는 말은 노자 <<도덕경>> 제5장의 다음 문장에 나온다."天地不仁(천지불인) 以萬物爲芻狗(이만물위추구): 하늘과 땅은 무심하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로 여긴다. 聖人不仁(성인불인) 以百姓爲芻狗(이백성위추구): 성인도 무심하다. 백성들을 짚으로 만든 개로 여긴다."
하늘과 땅, 천지 불인(不仁)하여 만물을 "추구(芻狗)"로 삼고, 성인도 불인하여 백성을 "추구"로 삼는다는 거다. "추구"는 제사 때 사용하는 풀로 만든 개이다. 제사 때만 의례용으로 사용하다가 제사가 끝나면 버려버리므로 제사 후에는 아무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장자>>의 "천운(天運)"에 나온다. 도올의 "그 카이로스가 아니면 그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설명이 멋지다. 사람들이 제사 후 추구를 대하듯이 천지 자연은 그렇게 무심하게 만물을 대한다는 뜻이다. 천지가 만물을 소홀히 함부로 대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자신의 의지가 개입됨이 없이 무심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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