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웅 중구난방] 종국적 욕망과 도구적 욕망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무엇인가 원하고 바란다. 갓난아기가 울음을 터뜨려 엄마가 젖주기를 바라는 것에서부터 학생이 되면 좋은 점수를 받기 원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한다.
대학을 졸업하면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원하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원한다. 또한 자신의 이상형 이성을 만나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고, 내집을 마련할 수 있기를 원한다.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 자녀가 잘되기 원하고, 온가족의 안전과 건강을 원하고, 돈을 넉넉히 모아 노년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이처럼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끝도 없고 한도 없다.
그처럼 원하고 바라는 것이 욕구(need)이고 욕망(desire)이다.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원할 때 욕구라고 할 수 있으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욕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욕구와 욕망의 노예일까? 더욱이 생존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닌 욕망은 왜 생겨서 집착하게 되는 걸까?
간단히 말하면 욕망은 자신에게 무엇인가 부족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할 때 생겨나는 감정이다. 결핍감이 클수록, 또 불만(불만족)이 클수록 그만큼 욕망도 절박하고 간절해진다. 따라서 욕망은 결핍감을 채우고 불만족을 해소시켜 만족감을 얻기 위해 작동한다. 그러면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인가?
그것은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욕망이 생겨난다. 하지만 어떠한 욕망이든 그 최종목표는 행복추구에 있을 것이다. 부족함이 채워지고 불만족이 해소돼 만족감을 얻으면 당연히 행복할 것이다. 그러면 행복은 영속적일까? 그렇지 않다. 현재의 부족감과 불만족이 해결돼도 또 다른 형태의 부족감, 불만이 생겨나, 또 다시 원하는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 욕망의 속성이기도 하다.
미국 <라이트대학> 철학과의 윌리엄 어빈(William B.Irvine) 교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는 왜 원하는가’하는 부제가 붙어있는 그의 역저 <욕망의 발견>(ON Desire)에서 그러한 욕망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종국적 욕망과 도구적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종국적 욕망’(Teminal Desire)은 어떤 것, 그 자체를 원하는 욕망이다. 예컨대, 배가 몹시 고프면 먹을 것을 원하게 되고 그것을 먹으면 배고픔이 해소된다. 다시 말해 욕망이 해결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배가 고플 때 먹을 것을 원하는 종국적 욕망이 생기지만, 그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밥을 먹을까, 국수를 먹을까 선택을 할 수 있고, 한식, 양식, 일식, 어느 식당으로 갈까 잠시 망설일 수도 있다. 또한 멀더라도 맛집을 찾아갈까? 그냥 가까운 식당을 찾아갈까? 망설이기도 하고, 차를 타고 갈까, 걸어갈까 망설이다가 결정을 내리고 차를 타고 식당으로 향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메뉴의 선택, 식당의 선택, 교통수단의 선택 등이 모두 결국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욕망이 ‘도구적 욕망’(Instrumental Desire)이다. 쉽게 말하면 배고픔을 해소하려는 종국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실행하는 과정들이 곧 도구적 욕망인 것이다.
가령 고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 당면한 종국적 욕망은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끝없이 공부하겠다는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국적 욕망인 자신의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스스로 원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이럴 때 공부가 도구적 욕망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의 욕망은 끝도 없고 한도 없다. 당면한 종국적 욕망이 해소되면 또 다른 종국적 욕망이 생겨난다. 고3 학생이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고 해서 종국적 욕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 좋은 직장에 가고 싶은 또 다른 종국적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윌리엄 어빈 교수는 “우리 인간이 끊임없이 욕망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을 해소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면서,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원하고 바라게 되도록 프로그램화 돼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종국적 욕망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일해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를 갖고 있다고 하자. 그이 종국적 욕망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 남다른 노력 등은 결국 부자가 되고 싶다는 종국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적 욕망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마침내 큰 부자가 됐다고 치자. 그가 원했던 종국적 욕망을 달성했다고 거기서 끝나는가? 아니다. 한 동안은 아무런 부족 없이 만족하겠지만, ‘말 타면 종 두고 싶다’는 속담처럼 또 다른 종국적 욕망이 고개를 든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다행히 자신이 축적한 많은 재산을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곳에 기부하겠다든지, 불우이웃을 돕는데 쓰겠다든지, 긍정적인 종국적 욕망을 갖는다면 많은 박수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오랫동안 원했던 큰 종국적 욕망을 성취한 매우 많은 사람들이, 성취감에 도취된 나머지,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새로운 종국적 욕망을 설정하지 못하고 쾌락추구에 빠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
윌리엄 어빈도 앞의 긍정적 욕망을 ‘비(非)쾌락적 욕망’ 쾌락추구를 ‘쾌락적 욕망’으로 나누었다. 쾌락적 욕망은 도박, 마약, 퇴폐적인 음주 등, 그야말로 오직 한 순간 쾌락을 얻을 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욕망이다. 그 후유증은 엄청나다. 쾌락추구에는 강한 중독성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을 뿐 아니라, 마침내 자신을 완전히 파멸시킨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종국적 욕망은 자신의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진다. 자신이 오랫동안 원했던 매우 가치있는 종국적 욕망을 성취했다면 그 다음에는 비쾌락적 욕망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석유왕으로 불렸던 미국의 록펠러는 석유사업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면서 중소업자들을 수없이 도산시킨 독점과 노동자 착취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하지만 55세 때 큰 병이 걸려 병원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불우한 소녀에게 도움을 준 뒤, 인생관이 완전히 바꿨다.
“나는 지금까지 인생의 절반 이상을 헛살았다. 남을 돕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이제야 깨달았다. 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나의 나머지 인생은 남을 돕는 일에 헌신하겠다.”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98세까지 살았으니까 거의 절반에 가까운 나머지 인생을 비쾌락적 욕망으로 스스로 행복감을 느끼며 보람있게 살았던 것이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로 억만장자가 된 빌 게이츠도 역사에 남을만한 종국적 욕망을 달성한 뒤에는 자신이 세운 마이크로 소프트에서 스스로 물러나 아내와 함께 자선재단을 세우고 아프리카 등의 가난과 질병퇴치에 헌신하고 있다.
윌리엄 어빈은 쾌락추구를 경계하며 “쾌락을 놓으면 더 큰 쾌락이 온다.”고 했다. 록펠러나 빌 게이츠는 비쾌락적 욕망을 통해 더 큰 쾌락을 얻고 있는 것이다. 어빈은 또 “절제하는 쾌락에 빠져들어라.”라고 했다. 욕망의 절제를 통해서도 쾌락을 얻을 수 있다. 부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은 욕망절제에 있다는 것을 밝혀낸 최근의 연구결과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