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강균 연기자, 배우 [사진=더코리아저널]


[신강균 걸침탐구]물김치 한 줄

물김치 한 줄ᆢ

수필 아니, 술이 썼으니 술필일터ᆢ

노트북을 닫고 뒷산 설국에 오르니 물김치처럼 시원하다ᆢ

소망탑 앞에 大자로 누워있는 눈사람은 무얼 소망하고 있을까ᆢ

새해 모두 이제 그만 술에서 깨, 상큼하고 션~~한 세상이 되었으면ᆢ

복마니 받으시길ᆢ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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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김치 한 줄

걸침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창밖에서 친구가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말을 셰익스피어가 했던가. 어제 오랜만에 친구의 부름을 받고 거하게 한잔 했다. 오후 세시부터 만난 자리가 열 시가 되어서야 그것도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니 그래도 집은 찾아온 모양이다. 보통은 내가 아침을 차려 바치는데 오늘 내 모습을 보니 가관이었던 모양이다. 다리와 몸을 겨우 이어 붙여 식탁에 앉았다. 눈꺼풀은 아직 반쯤 붙어있어 반찬들이 서로 겹쳐진다. 밥맛이 아니 입맛이 아직 나를 당기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술을 물 붇듯이 퍼 마셨는데 왜 목은 마를까. 그렇게 부드럽기 그지없는 술들을 고루 마셨는데 속은 날카로운 것들이 훑고 간 것처럼 쓰릴까. 알코올이라 휘발하면서 옆에 있던 몸의 물을 사이좋게 달고 날아가버렸을까. 알코올이 불이 붙으면서 속에 있던 세포들을 태워 없애버렸을까.

아내의 화살눈이 날아오기 직전, 그때였다. 세상처럼 어지럽게 돌던 나의 두 눈을 잡아당긴 것은, 바로 물김치였다. 단숨에 한 사발을 들이켰다. 너덜거리던 속이 시원해졌다. 입에서 아삭대는 맛, 그래 이 맛이다. 하늘을 향해 무수한 팔을 뻗어 비바람을 안았던 배추가 주는 아량의 맛, 땅을 향해 수백 번의 스쾃으로 다리를 키운 무가 전하는 강인한 맛, 태양과 맞서서 빨갛게 탄 고추에서 오는 정열의 맛, 하늘에서 내려온 물을 수만 번의 조금과 사리의 시간을 거쳐 구운 소금의 짜디짠 인내의 맛, 그 오랜 시간들이 이 한 사발에 버무려졌다.

무언가 훑고 지나간 속에서 신호를 보낸다. 친구라 해도 가끔 가시 돋친 충고가 오가고 거친 변명이 들낙이고 심중에 있던 뾰족한 오해들이 찌르고 간 터널, 그 어둠을 저 용감하고 마음 넓은 한 사발이 달래주는 것이다.

물김치는 어머니다. 목마른 자식을 끌어안고 시원한 냉수 한 바가지를 부어주는 그래서 삶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어머니. 아니 물김치는 애인이다. 내 관심을 묘하게 끌어 상큼한 맛을 선사하고 내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는 상대, 내 글도 물김치를 닮을 수 있을까. 알코올처럼 휘발성이 강한 글더미 속에서 목말라하는 독자의 손을 끌 수 있는 글,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그들의 머리를 상쾌하게 해 주고 그들의 고달픔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글이 지어질 수 있을까.

목을 어루만진다. 어제 그렇게 오랜 시간 떠들고 나서도 취중에 판소리 한 대목을 읊은 생각이 난다. 목상태가 제 맛이 아니다. 다시 물김치 반 사발을 삼킨다. 컬컬한 맛, 바로 춘향가 눈대목의 맛이다. 목이 가라앉는다. 속이 풀어진다. 물김치 그릇에 남은 미나리 한 점을 건져 입에 넣는다. 질고 험한 땅에서 길러진 부드럽고 상큼한 내음이 난다. 오늘 물김치 같은 하루를 담아보자. 그런 글이 나올 수 있게 익혀보자. 팔을 걷고 노트북 도마를 올린다.

[사진=신강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