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운동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한표 인문일지] 살다가 레몬이 생기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
1.
<폭싹 속았수다-매우 수고하셨습니다>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 부분에 가슴이 찡하며,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 안 될까? 남을 아프게 하고 돈을 벌면 행복한가? 삶의 가치관이 없던 시대를 살았구나! 그래도 지금은 많이 문명화 되었는데, 역사는 직진하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그래도 나아간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충청도 말로는 '욕봤어!' 같다. 영어 제목은 '인생이 당신에게 귤을 줄 때' 혹은 '살다가 귤이 생기면'이다. 영어로는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mandarines) 이다. 이 말은 미국 철학자 엘버트 허비드가 남긴 명언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살다가 레몬이 생기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에서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시련을 극복하라는 의미이다.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두 주인공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인생이 떫은 귤을 던지더라도, 그걸로 귤청을 만들어서 따뜻한 귤차를 만들어 먹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주인공 아이유는 말했다.
스페인어로는 "만약 삶이 나에게 귤을 준다면", 태국어로는 "귤이 달지 않는 날에도 웃자"로, 대만: 고진감래(苦盡甘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고생 끝에 너를 만나다'라는 말에서 '달 감(甘)' 대신 '귤 감(柑)'으로 바꾸었다.
이런 식으로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인 인기를 끄려면, 영어 제목을 잘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국내외에 돌풍을 일으킨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영어판 제목은 'Extraordinary Attorney Woo'(놀라운 우 변호사)이다. '이상한'이라는 뜻을 지닌 'weird'나 'strange' 대신 평범하지 않다는 의미와 함께 비범하거나 비상하다는 분위기를 담은 'extraordinary'를 택했었다.
그리고 지난해 3주 연속 넷플릭스 비영어권 콘텐츠 중 가장 많이 시청된 작품에 이름을 올렸던 <흑백요리사>는 인종 갈등이 첨예한 영어권에서 "흑백"'이라는 표현이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점을 고려해 <Culinary Class War'(요리 계급 전쟁)>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2.
2025년 초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시인과 촌장이 불렀다는 노래의 가사인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이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더 빛나고, 위로가 되는 곡으로, 포크 듀오 시인과 촌장의 곡 '풍경'의 가사이다.
이 노래를 유튜브로 다시 들어 본다. 이 노래는 시인과 촌장 정규 2집 <푸른 돛>에 수록된 곡으로 목가적이면서도 평화로운 선율이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포크 기타 선율 위 기교 없이 순수하고 나지막이 흐르는 두 멤버의 화음 섞인 가창은 곡의 서정성을 더한다. 멤버 하덕규가 작사와 작곡을, 함춘호가 편곡을 맡았다. 단 네 소절에 불과한 가사는 마치 눈 앞에 보이는 듯 직관적이고 쉬운 표현으로 쓰여져 있어 흡사 한 편의 시와도 같다. 본래의 자리를 떠났던 무언가(혹은 누군가)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저만치 떨어져 목도하거나, 혹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누군가(혹은 무언가)를 그 자리에서 바라보며 맞이하는 풍경을 머릿 속에 그려보며 곡을 감상하면 그 누구든 내면의 서정을 마주하게 될 수 밖에 없겠다.
가사 자체가 주는 울림의 크기도 상당해 대중 음악계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엔 광화문글판 30년을 맞아 시민 공모로 선정된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이란 가사가 서울 종로구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외벽에 게시됐다.
팬데믹 장기화로 힘든 시기가 이어지던 가운데 하루 빨리 평화롭고 온전한 일상이 오길 바라는 희망을 담은 글귀로 많은 시민들에게 위로를 줬다. 때로는 가장 단순하고 쉬운 말이 장황한 설명과 미사여구 가득한 복잡한 말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경우가 있다. 지난 달 헌법재판소에서 있었던 탄핵 재판 변론에서도 등장했던 이 노랫말처럼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리도 하루 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 그립다.
3.
지난 주에 했던 사유들이다. 매일 <인문 일지>를 쓰는 이유는 책을 읽기 위한 것이고, 단순하게 살려고 사람 들과의 만남을 최소화 하는 데 결핍 된 글쓰기가 주는 해방 감과 소통의 기쁨 때문이다.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으려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시도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깨닫게 된다. 글쓰기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세상을 탐구하는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글 감을 찾고, 사람을 만나고, 질문을 던지며 끝없이 타인과 세상을 탐구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탄생한다.
매일 써야 한다. 매일 쓰려면 매일 글 감을 고민해야 하고, 쓰다 보면 글자와 문장과 표현이 몸에 스민다. 어제의 글을 돌아보며 오늘을 생각하고, 조금 더 나은 내일의 문장을 고민하게 된다. 타고난 재능이 없는 작가라 해도, 매일 저어가다 보면 적어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작가는 책 속에 그 발자국의 지도를 그리게 된다.
4.
대부분 식물이 흙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데 비해 풍란은 하늘을 향해 뿌리를 뻗고 사는 신비함이 있어 좋다. 서양란은 크고 꽃도 화려하지만 향기가 없는데, 동양란인 풍란은 ‘크기는 작지만 향기가 10리까지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향이 짙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풍란은 늘 땅의 것에 연연하며 살아가기 쉬운 우리를 향해 교훈을 준다. 우리에게 ‘무엇을 지향하며 어디에 삶의 뿌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 같다.
인간(人間)은 종종 '땀'보다 '돈'을 먼저 가지려 하고, '설렘'보다 '희열'을 먼저 맛보려 하며, '베이스캠프' 보다 '정상'을 먼저 정복하고 싶어한다. 노력보다 결과를 먼저 기대하기 때문에 무모해지고, 탐욕스러워지고, 조바심 내고, 빨리 좌절하기도 한다. 자연은 '봄' 다음 바로 '겨울'을 맞게 하지 않았고, 뿌리에서 바로 꽃을 피우지 않게 하였기에, 오늘 땅 위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했고, 가을엔 어김없이 열매를 거두게 했다.
만물은 물 흐르듯 태어나고, 자라나서 또 사라진다. 이 세상에는 변치 않는게 없고,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없고, 지금 가진 것을 영원히 누릴 수도 없다. 자연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고, 기다림은 헛됨이 아닌 과정 이었다고." 그 기다림이 그리움으로 이어지고, 그 그리움이 설렘이 된다. 그리움은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를 마음 속에 긁는 것이기도 하다. 그 그리움이 현실이 될 때가 '설렘'이 된다. 설렘이 많아야 그만큼 더 행복하다. 행복은 작은 것에 있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한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행복하다. 행복은 평범한 일상 속에 순간이라는 이름으로 숨어 있다. 나는 매일 그걸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5.
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 세상은 우리의 불행에 아무 관심도 없으니 자기 연민에 빠져 혼자 서러워하지 말고 다가온 모든 운명을 끌어안아라. 그것이 체념보다 낫다. 이왕 힘들어할 거 격식 있고 우아하게 불행 하는 거다. "운명이란 늘 우연을 가장해서 온다"(기 드 모파상). '우연'을 프랑스어로 하면, 'le hasard'이다. 거꾸로 이 단어를 프랑스어 사전으로 찾으면, '우연'이라는 뜻과 함께 '운명'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골프 용어로는 '장애지역', 즉 '해저드'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러니까 삶은 수많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우연들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일까? 우연이 거듭되면 운명이 되는 것일까? 그런 우연이 왜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반면 요즈음 우리 사회를 좌절하게 만드는 많은 사건들이 우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다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사는 것이 힘겨운 서민들에게는 그 흔한 우연이 끼어들지 않는다. 서울 강남에 땅도 없고, 주식을 줄 만큼 부자인 친구도 없으니 당연한 것인가? 그나마 불운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것일까? 운에도 총량이란 것이 있어서 누군가 행운을 누리는 만큼 다른 이들은 불운을 나눠 가져야 하는 것인가? 나에게는 질문들만 꼬리를 문다.
그래도 삶을 만끽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다. 세상은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만큼만 보여준다. 그러니까 재미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재미 투성이'인 것이다. 오래 살았다고 나이가 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꿈을 저버릴 때 나이가 드는 것이다. 다시 열정을 불태우리라.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만들지만, 열정을 포기하는 것은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그러니까 열정을 잃고 사는 사람이 최고로 늙은 사람이다. 삶의 열정에는 마침표가 없다. 삶은 그냥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행운을 부르는 우연이 찾아오지 않아도 삶은 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나은 삶의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열쇠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깨닫지 못한 인생의 경험과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수많은 우연으로 점철된 여행이라 할지라도, 여행의 목적지는 종착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를 마음껏 즐기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여행길에서 뜻밖의 행운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더없이 큰 기쁨일 것이다. 미완성인채로 여행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삶에 재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그저 감탄하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세상은 즐거운 일들 로만 가득 차게 되고, 삶은 신나고 재미있어 진다. 인생과 연애를 하듯 살게 된다. 삶에는 이론이 없다. 삶은 그냥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때 에르스트 블로흐가 말하는 것처럼, "놀라움이 비처럼 내린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아름답게 나이"들고 싶다.
아름답게 나이 든다는 것/김한규
그것은 끝없는 내 안의 담금질
꽃은 질 때가 더 아름답다는 순종의 미처럼
곧 떨어질 듯 아름다운 자태를 놓지 않는 노을은
구름에 몸을 살짝 숨겼을 때 더 아름다워
비 내리는 날에도 한 번도 구름을 탓하는 법이 없다
우아하게 나이 든다는 것
그것은 끝없이 내 안의 샘물을 길어 올려
우리들의 갈라진 손마디에 수분이 되어주는 일
빈 두레박은 소리 나지 않게 내려 내 안의 꿈틀거리는 불씨를
조용히 피워내는 불쏘시개가 되는 일.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것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욕망의 가지를 피를 토하는 아픔으로 잘라내는 일
혈관의 동파에도 안으로 조용히 수습하여
갈라진 우리들의 마른 강물에 봄비가 되어주는 일.
살다가 문득 홀로 거닐다 바라본 높은 하늘이 너무 청아해
누군가에게 꼭 하늘을 마주 바라보자는 그 말을 전하고 싶어
문자를 보내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너 혹은 나의 처진 어깨를 펴 주고
가끔은 나를 버려 우리를 사랑하는 일이다
추하지 않게 주름을 보태어 가는 일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모르고 지낸 날들이 다만 슬펐을 뿐
[사진=박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