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대원 작가. 독서지도사 [사진=더코리아저널]


[변대원 독서일기] 이 곳의 낡음은 우리의 늙음과 닮았다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

일정상 저녁 비행기로 제주에 도착해서 공항 근처에서 잠만 자고 이동하려고 첫날 숙소는 최대한 가깝고 싼 곳으로 구했다. 사진상으로 나쁘지 않았고, 방도 넓었고, 가격도 착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예약한 숙소였다. 그것이 실책이었다. 택시에서 내릴 때부터 뭔가 싸했다. 규모가 제법 큰 호텔이었는데, 이토록 낡았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호텔 로비의 공기는 무겁고,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스며 있었다. 바닥의 카페트는 오래된 얼룩을 품고 있었고, 벽지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심지어 복도에는 담배냄새가 잔뜩 베여있었다. 방은 그저 넓기만 할 뿐 이 외 어떤 메리트도 없었다. 본의 아니게 가족들의 질타를 한 몸에 받아야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은 이미 늦었고, 조금 불편해도 오늘은 이곳에서 묵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을. 정말이지 이렇게 낡은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다음날 아침 일찍 렌터카를 픽업하러 가는 길에 호텔을 좀 더 자세히 둘러보니 낡고 관리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처음에는 무척이나 훌륭한 인테리어였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내부는 고급스러운 나무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로비 역시 비싼 대리석임이 보였다. 건물 자체로 크고 위치 또한 좋았다. 이곳이 낡은 이유는 그저 수십 년간 정체되었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낡은 호텔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오래된 것은 모두 낡은 걸까?

낡음이란 단순히 시간의 흐름 때문이 아니라, 관리되지 않고 멈춰버린 것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이곳의 낡음이 우리 삶의 늙음과 닮았다.

낡음은 더 이상의 새로움이 없는 상태다. 낡음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상태다.

낡음은 정체성 없이 그저 정체된 상태다. 낡음은 속절없이 허송세월만 보내다 늙어버린 인생 같다.

이 낡은 호텔이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50년 이상 된 것 같진 않다. 하지만 100년이 넘은 힐튼호텔을 낡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오래됨은 낡음이 아니다. 어떤 오래됨은 새로움보다 더 멋지고 찬란하기 때문이다.

100년이 넘은 명품들을 낡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170년이 넘은 루이비통은 어떤 새롭고 참신한 패션브랜드도 흉내 낼 수 없는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계 3대 시계 명품으로 불리는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는 모두 15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런 브랜드에게 오히려 오래됨이란 스스로의 가치를 더욱 극대화하는 최고의 강점이 되기도 한다. 포르셰나 벤츠같은 유명 자동차 브랜드 역시 90년을 넘어 100년을 목전에 두고 있고, 여전히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탄산음료인 코카콜라는 130년 넘게 사랑받고 있다.

낡음과 달리 시간이 갈수록 더 가치를 지닌 인류가 만들어 낸 유산을 '헤리티지(Hertige)'라고 한다. 흔히 브랜드의 역사와 전통을 표현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그렇다면 낡음과 헤리티지를 가르는 차이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애정이다. 방치된 물건은 낡아서 쓸모없어지지만, 애정을 가지고 오랫동안 관리된 물건은 손때묻은 특별함이 생긴다. 100년도 넘은 힐튼 호텔은 그들만의 철학과 정체성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개선하고 관리해 왔을 것이다.

두 번째는 맥락과 가치다.

제주 성읍에 있는 민속마을은 일부러 옛 제주의 모습과 정취를 보존하고 있다. 애써 오래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호텔의 오래됨은 맥락과 가치가 전혀 다르다. 무분별하고 정체성 없는 개발은 공간의 가치를 훼손하고 결과적으로 수익성 악화로 이어졌을 것이다. 수익이 낮아지니 시설이나 인력에 대한 투자나 관리를 더욱 소홀하게 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방치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 번째는 스토리다.

모든 것은 사람과 사람 간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그냥 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는 바나나는 몇천 원에도 살 수 있지만,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의 바나나는 87억이나 한다.

저 바나나 자체가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예술작품이 가지는 스토리가 특별하기 때문에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비싼 예술작품까지 갈 것도 없이, 아버님이 유품으로 남겨주신 시계나 노트가 시중에 파는 그것과 같은 가치일리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한 개인으로써 나의 나이듦을 돌아본다.

낡음은 방치된 것이다. 애정 없이 그대로 정체된 상태다. 우리 삶이 낡으면 그저 늙어 버린다.

반면 헤리티지는 가꾸고, 관리하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의미를 키워가는 상태다. 나이가 들수록 더 성숙해지고, 멋있어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방치되어 있는가?

아니면 관리되고 있는가?

나는 시간이 갈수록 나만의 맥락(삶의 방향과 이상)으로 다듬어져 가는 존재인가?

아니면 이것저것 맥락 없이 그때그때 수동적으로 반응만 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스토리가 아닌 타인의 스토리에만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오래됨이 낡음이 아니듯 나이듦 역시 단순한 늙음이라 볼 수 없다.

어느 낡은 호텔에 묵은 덕분에 나이듦의 철학을 생각한다.

[사진=변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