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 운동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한표 인문일지]권불십년 화무십일홍

1.

순자가 말한 "수즉재주 수즉복주(水則載舟, 水則覆舟)"을 기억해야 한다.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시민은 물이고, 대통령은 배이다. 대통령 없이도 시민은 살아갈 수 있지만, 시민 없는 대통령은 존재할 수 없다. 지도자는 고전을 잀으며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 말이 나왔으니 다음 말도 소환한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 "아무리 붉고 탐스러운 꽃이라 하여도 열흘을 넘기지 어렵고,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가라도 권세는 10년을 넘기지 못한다." 그래 오늘 아침 사진은 어제 찍은 명자나무 꽃을 공유한다.

빨간 화등 주렁주렁 달고 있는 이 꽃은 아가씨나무 꽃 또는 산당화라고도 한다. 명자야 너만 믿는다. 권불십년이라고 미친 바람에게 말 좀 해다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이 꽃만 보면 떠오르는 거다. 명자나무꽃 또는 아가씨나무꽃 또는 산당화라고도 한다.

명자나무꽃/이호준

명자가 빨간 치마자락을 감았다.

환장하게 곱더라

새초롬 흘겨보며 요염을 떠는데

잡것

화무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 했거늘

내 어찌 한 철 요망이냐 그랬더니

제가 백일홍보다는 못하여도

내 봄날은 붉디 붉게 버티리니

영감은 가던 길 가시오 하더라

명자, 아니 산당화 요것이

내 붉은 심장을 네가 아직도 못 알아보느냐

오늘도 "다시 채우는 힘"에 대해 성찰을 한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결과가 보장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옳기에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사회적 변화가 필요할 때, 불평등과 차별을 개선하려 할때 우리는 '때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을 강요 받는다. 역사는 말한다. 자유와 정의는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분투와 희생을 통해 간신히 쟁취되는 것이다.

루터의 말처럼 "기다림이란 종종 거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정의를 지연시키는 것은 정의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다림 속에서 희망이 사라진다면, 결국 남는 것은 절망이다. 희망은 기대한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묵묵한 행동 속에서 싹튼다.우리가 기다림이 아닌 행동을 선택할 때,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2.

메튜 폭스(Metthew Fox)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김기석 목사의 책, <<최소한의 품격>>에서 알게 된 거다.

▪ 하나는 '사다리 오르기 로서의 삶'이다.

이런 삶을 선택한 이들은 늘 경쟁에 내몰린다. 오르려는 이들은 많고 기회는 적기 때문이다. 가끔은 앞선 이들을 끌어내리기도 하고 뒤따라오는 이들을 짓밟기도 한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적대감과 원망이 마치 공기처럼 주변을 떠돈다. 승자들은 많은 것을 누리며 자기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에 도취된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모욕하고 멸시한다.

도스토엡스키는<<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권력은 인간을 눈멀게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악함은 습관이 된다. 이것은 차차 발전하여 마침내는 병이 된다. 나는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 해도 이러한 타성 때문에 짐승처럼 우매해지고 광폭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속적인 성공이 곧 그 사람의 품격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적 따스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 그 다른 하나가 '원무, 즉 둥근 꼴을 이루어 추는 춤으로 서의 삶이다. 앙리 마티스의 <춤>을 떠올리면 된다.

초록색 대지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알몸의 여인들이 춤을 추고 있다. 색채는 강렬하고 구도는 단순하다. 선은 한껏 자유로워 여인들이 느끼는 기쁨과 에너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다섯 명의 여인들은 서로 손을 잡은 채 원을 이루고 있다. 원은 높낮이가 없다. 원무의 기쁨 속에 녹아 든 이들은 저 바깥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을 자기들의 춤 속으로 기꺼이 맞아들인다.

함께 손을 잡는 순간 원은 더 커지고 기쁨 또한 증대된다. 분열된 세상에서 하나 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확대된 욕망을 능력으로 삼는 소비 사회에서 이런 삶은 불가능한 거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우리가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자족하는 마음은 소비 사회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다.

3.

고진하 시인은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고 말했다. "아라비아 숫자"는 일종의 기호일 뿐이지만 그 숫자 때문에 희망을 품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아라비아 숫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일렬로 세워 계층화 한다. 성인이 되었다고 하여 "아라비아 숫자"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연봉, 타고 다니는 차의 배기량, 살고 있는 집의 평수는 사람들을 가시적으로 서열화 한다.

"아라비아 숫자"는 사람들을 우쭐거리게 만들거나 주눅 들게 만든다. "아라비아 숫자"는 힘이 세다. 하지만 "아라비아 숫자"가 할 수 없는 일도 많다. 사람의 품격이나 아름다움, 공감 능력, 책임감, 우정, 사랑 등을 계량화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라비아 숫자"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욕망은 특정한 방향을 행해 내달리도록 만든다.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늘 숨이 찰 수밖에 없다. 다른 이들을 돌아볼 여백이 자기 속에 없기에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을 보일 수가 없다.

나이가 들어가며 깨닫는 것은 순위보다 삶의 태도이다. 순위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다음 말이 소환된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퍼트리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숫자보다 모두가 공생하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4.

268명의 하버드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장기 연구 프로젝트인 '그랜트 연구'는 1938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80년 이상을 이어가고 있다. 실험 참가자들의 성격, 지성, 건강, 습관, 관계 등이 풍요로운 삶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연구였다. 30년 이상 그 연구를 이끈 베일런트 박사는 '그랜트 연구' 결과로 얻은 교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라고 대답했다.

친밀한 관계가 돈이나 명예보다 중요했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형편없는 삶으로 하강하지 않도록 지켜주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쇠약해지는 속도를 늦추 더라는 것이다.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맞아들일 여백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인지 허물없이 이웃을 맞아들이기도 했던 집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변했고,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도 서먹하기 이를 데 없다. 직접 대면보다 익숙한 것은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한 간접적 만남이다. 그 공간에서는 상대방의 글에 "좋아요", "힘내요", "슬퍼요" 등으로 공감을 표현할 수 있지만, 그의 현실에 깊이 연루되지는 않는다.

삶의 의미는 다른 이들의 필요에 응답할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헤셀은 우리가 :절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 했다. 고통받는 타자들의 삶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안을 때 우리 삶은 확장되는 동시에 상승한다. 상승이란 욕망 주변을 맴돌던 삶에서 벗어나 더 큰 존재의 지평 속에서 세상을 바라봄을 의미한다.욕망이 삶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고립을 면하기 어렵다. 부푼 욕망에는 타자를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5.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제3의 공간(Third Place)이다. 그런 공간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모든 사람은 쉴 수 있는 제 3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곳에서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제 3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낯설게' 대면하며, 자기만의 시간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3의 공간은 1,2 공간이라 불리는 집과 직장을 제외한 공간을 말한다. (미국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 그러나 제 3의 공간은 이래야 한다.

▪ 격식이나 서열이 없고,

▪ 소박하고,

▪ 수다가 있고,

▪ 출입이 자유롭고,

▪ 음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 곳으로 카페, 서점, 바, 헤어살롱, 각종 커뮤니티 등이 그런 곳이 아닐까? 내 와인복합문화공간인 <뱅샾62>가 그런 곳이다.

그리고 이디쉬어로 '키비츠'라는 말이 있다. '친구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모든 것을 일컫는 말이다. 몰려다니며, 농담하고, 수다를 떨고, 놀리고, 이야기하고, 마음의 짐을 풀어놓고, 귀 기울여 들어주고, 킬킬거리는 등을 일들 말이다. 하찮고 사소해 보이지만 '키비츠'의 시간은 무의미하지 않다. 오히려 목적 지향적인 삶과 의미 추구의 무거움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삶은 의미와 무의미, 당위와 현실, 경쟁과 협동, 역할과 노릇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결렬한 운동을 하거나 힘든 노동을 한 후에 몸에 쌓인 피로 물질을 적절히 풀어내야 하듯이, 우리 정신에 알게 모르게 누적된 무거움을 풀어놓아야 건강한 사람을 누릴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와인이다.

내가 와인을 알게 되고, 전문가로 밥 벌이를 하게 된 것은 유학 시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와인을 마시는 이유는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 괴로움을 견디는 게 훨씬 수월하였기 때문이다. 와인을 많이 마시면 몸이 괴롭다. 그러나 괴로움보다 외로움이 더 힘들어 와인을 마신다.

외로움을 주고 괴로움을 받는 정직한 거래가 와인 마시기이다. 그리고 와인을 마시다 보니, 와인 맛의 10%는 와인을 빚은 사람이고, 나머지 90%는 마주 앉은 사람이다. 우리는 알코올에 취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 취한다. 내 입에서 나오는 아무 말에 과장된 반응을 보여주는 내 앞에 앉은 사람에게 우리는 취한다. 그는 내 외로움을 홀짝홀짝 다 받아 마시고 허허 웃으면, 우리는 그 맑은 표정에 취한다. 그래 나는 나를 '와인 팔며 마시는 인문 운동가'로 행복하다.

[사진=박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