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운동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한표 인문일지]평범하여 찬란한 삶
1
오늘 아침 사진은 민들레 꽃과 홑씨이다. 주말 노장 가는 길에 봄 빛이 조금이라도 스며드는 곳에는 온통 민들레 꽃들이다. 일찍 핀 곳에는 벌써 홀씨도 보인다. 아니 홀씨가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민들레의 씨앗을 두고 민들레 홀씨라고 부른다. 가수 박경미가 부른 '민들레 홀씨 되어'도 그렇고, 책이나 신문, 사람들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쓰여왔으니 그것이 정말 맞다고 여긴다.
그러나 민들레 꽃이 진 뒤에 생기는 '하얀 털 뭉치'는 홀씨가 아니다. 홀씨를 한자로 하면, 포자(包子)이다. 이끼, 곰팡이, 버섯 등 꽃이 피지 않는 식물들이 포자로 번식한다. 아마도 민들레 꽃씨의 둥근 풍선 모양을 훅 하고 불어 본 경험들이 많을 것이다. 흔하게 모든 꽃씨는 쉬이 날라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 글지 않은 민들레 꽃씨는 붙들고 있다가 가벼워져야 훅 하면 날라간다는 거다. 영글면 가벼워 진다. 더 가벼워지려면 예언자 미가의 말처럼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
"더 가벼워지려면 주변에 많은 나눔으로 비우고 욕심을 덜어내고 가진 재능이 있다면 쓰임이 있는 곳에서 잘 풀어내며 살자. 마지막 순간에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가벼운 존재로 만들어 가야 함을 새삼 민들레 홑 씨를 통해 나를 다져보다."(장윤희) 오늘 아침 사진을 선택하고, 류시화 시인의 <민들레>를 공유한다.
민들레/류시화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
[사진=박한표]
2.
<럭키 루이>라는 시트콤에 아빠와 어린 딸의 대화가 나온다. “왜 걔는 갖고 나는 못 갖죠? 이건 공평하지 않아요”라고 투정하는 어린 딸에게 아빠는 말한다. “항상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을 가지진 못해.” 아빠는 그러면서 “잘 들어. 네 이웃의 그릇을 쳐다볼 오직 한 가지 이유는 그 사람이 부족하지는 않나 확인할 때밖에 없어. 네가 네 이웃만큼 가졌나 확인하려고 그의 그릇을 보면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면도날은 날카롭지만 나무를 자를 수 없고, 도끼날은 강하지만 수염을 Rr을 수 없다. 누구나 각자의 특성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에 상대를 깎아 내리는 어리석음보다는 높여주고 가치를 인정할 때 나도 발전한다.우리는 이웃의 그릇과 나의 그릇을 비교할 때가 있다. 비교가 우리에게 남기는 건 두 가지다. 내가 남보다 더 가졌다는 생각에 교만해지거나 내가 남보다 덜 가졌다는 생각에 비참해지는 것.
내가 일상에서 '만트라'처럼 외우는 문장이 "지족상락(知足常樂), 수분자안(守分自安)"이다. 지인에게서 배운 거다. '만트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만'은 '마음'을 의미하고, '트라'는 '도구'이다. 만트라를 말 그대로 하면, '마음 도구'이다. 특정한 음절이나 단어, 문장을 반복하면 강력한 파동이 생겨 마음이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트라는 나를 정신차리게 만드는 경종이다.
'지족상락'은 '족함을 알면 늘 즐겁다'는 뜻이다. 족함은 아는 것은 현재에 체념하거나 안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를 긍정하면서 밝은 내일을 위해 즐겁게 노력한다는 밝은 마음이다. 흔히 "지족상락(知足常樂), 능인자안(能認自安)"이라 한다. '능인자안'은 참고 견디면서 편안히 지낸다'는 말이다. 나는 이보다 "수분자안(守分自安)'이 더 낫다고 본다. 이건 '자신의 분수를 지키면서, 편안히 지낸다'는 말이다.
자족하는 법이 필요하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라야 흡족해 하는 것이 만족이라면, 자족은 어떠한 형편이든지 긍정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러니까 행복의 비결은 자족(自足)이다. 요즈음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은 끼니를 걱정하는 절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으로 무엇이나 남처럼 가지려 하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흔히 말하듯 '필요'보다 '욕심'에서 생기는 가난이다. 이럴 때 분수를 알고 자족할 줄 알면 빈곤감이 없어지고 자기에게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처럼 느끼며 살 수 있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할까? 결혼을 했든 혼자이든, 성공을 든 실패를 했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괴로움 없이 마음 편하게 사는 거다. 수분자안(守分自安)이다. 나의 '만트라'인 이건 '자신의 분수를 지키면서, 편안히 지낸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삶의 중심을 잘 잡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여긴다.
우리가 부자가 되면,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긴다는 거다.
▪ 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가난해진다.
▪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길 수 있다.
▪ 사람이고 자연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돈으로 보일 것이다.
▪ 함부로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리고 허깨비처럼 살다 보면 아이들이 살아갈 ‘오래된 미래’인 숲(자연)을 짓밟을 것이다.
3.
분별심을 없애라. 채근담에 이르기를 "굼벵이는 더럽지만 매미로 변하여 가을바람에 맑은 이슬을 마시고 썩은 풀은 빛이 없지만 반딧불로 변해서 여름밤을 빛낸다. 깨끗함은 항상 더러움에서 나오고 밝음은 항상 어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많고 적음도, 높고 낮음도, 깨끗하고 더러움도 모두 분별심에서 일어나니 분별심이 일지 않도록 해야겠다.
난 "수처작주 입처개진(數處作主 入處皆眞')이란 말을 좋아하고 실천한다.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있는 그 곳이 진실된 곳"이란 말이다. 다시 말하면,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것이다. 주인이 되지 못할 자리에는 안 가는 거다. 그러나 더 큰 의미가 있다. '네 삶의 주인이 되라'는 말이다. '수처작주'를 실천하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어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무슨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하기 싫다고 괴로워하지 말고 스스로 그 상황의 주인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처작주'는 '어디서나 어떠한 경우에도 얽매이지 않아 주체적이고 자유자재함'이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것이 자유와 행복의 길이다.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일을 대하고 처리해 나가면서 즐거워하는 것이 행복이다. 자유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보다 해야 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처작주'의 마음을 가지려면, 비교 분별의
마음을 비워야 한다.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비우고, 그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 된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니, 집착을 버리고 유연해지는 것이 '수처작주'의 시작이다. 미음을 비우고(분별심과 집착), 삶을 놀이로 만들면, 자유롭고, 즐겁고 행복해진다. 그때부터 '수처작주'의 삶이 시작된다.
4.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생활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낼 줄 알아야 한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나무의 가지를 져내듯이 말이다. 일상 생활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나면 살이 있는 것이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생활의 복잡함과 번거로움을 날려 버리는 소박한 삶은 운둔 하고 궁핍한 삶이 아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누리는 사치스러운 것도 아니다.
인생의 방식, 특히 기존의 질서가 강요하는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할 때 소박한 삶은 시작된다. "욕망의 억제는 소박함(樸)을 통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 소박함을 일깨우는 검소한 차실(茶室)이나, 기도하는 작은 골방 같은 구별된 공간을 갖는 일이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다. 몸 안에 영혼이 있고, 영혼이 우리를 이끌고 간다. 영혼이 메마르면, 몸도 마음도 메말라 버린다. 영혼이 메마르지 않도록, 지치지 않도록 물을 주어야 한다.
묵상이 우리의 영혼에 물을 주는 시간이다. 물을 주는 묵상은 골방에서 홀로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품위는 오랜 세월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꼼꼼하게 경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얻는다. 품위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 그것을 갖춰 보려고 애쓰는 것은 못 생긴 여자가 아름다워지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헛된 짓일 것이다. '위대한 개인'은 오랜 세월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꼼꼼하게 경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얻는다. 그것이 자기만의 골방을 가지고 묵상하는 것이다.
5.
누구나 좋은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나날이 충만하고 순간순간 충실한 삶, 하루하루 들어가는 나이가 몰락의 과정이 아니라 완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인 삶이야 말로 우리가 이룩하고 싶은 위대한 성취일 테다. 로마노 과르디니의 <<삶과 나이>>에 따르면, 모든 하루하루는 단 한 번 밖에 오지 않기에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함을 얻는다. 존중 받지 못할 순간도, 의미 없이 지나가는 순간도 없다. 순간의 존엄함을 아는 사람은 지금 여기의 삶을 온전히 누리려는 강렬한 긴장을 느낀다. 이런 긴장 없는 삶은 단조롭고 지루하게 다가온다. 때론 상실감과 후회 속에서 공허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위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린다 브린 피어스의 책, <<조금 소박하게>>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동네 중고 서점에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영어 제목은 "Choosing Simplicity"이다. 부제가 "Real People Finding Peace and fulfillment In a complex world"이다. 저자는 복잡한 세상에서 내적인 평화(Peace)와 동시에 성취감(fulfillement)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상 생활에서 스트레스의 원인을 모두 제거한다고 해서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적인 평화와 동시에 성취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며, 의미 있는 인새응ㄹ 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배우고, 성장하고, 이 세상에 이바지하도록 만들어진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의 인생 행로는 음과 양의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도전적이면서도 보람 있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작장에서 일하고 싶다.
그런데 그 직장은 우리의 가치관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고, 근무 내용이나 시간이 너무 빡빡해서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적인 평화와 성취감은 항상 서로 이끌리지 않으며 가끔은 양극단에 놓여 있을 때도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욕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맞춰 나가며 살고 있다.
그래 저자는 단순한 삶을 살라고 권한다. 단순한 삶은 균형과 목적 의식과 기쁨이 있는 사람을 촉진할 수 있다는 거다. 또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와 욕구를 알 수 있게해 주며, 나아가 내적인 평화와 성취감을 위한 비물질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거다.
단순한 삶은 쉬운 삶이 아니고, 현대 생활의 물질적인 이점으로 스스로 박탈한다는 것도 아니다. 단순한 삶에서 중요한 것이 자발성이다. 적절한 의식주와 의료 대책 없이 사는 것은 단순한 삶이 아니다. 그건 비자발적인 빈곤이다. 단순한 삶은 '사고하는 사람' 또는 '의식적인 삶'이다. 저자가
내린 단순한 삶의 정의는 내적인 평화와 성취감이 있는 참된 삶을 위해 더 많은 부와 지위와 권력을 추구하는 데에서 벗어나려는 평생 동안의 과정이다.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물질적인 안락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활에서 짐을 벗어 버리는 것, 물질적인 사물이나 행위나 관계에 마음을 덜 뺏기고 보다 가볍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단순한 삶에 이끌리는 것은 생활이 너무 복잡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람은 2 단계 과정의 거친다. 우선 인간으로서 우리라는 존재를 느끼고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내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참모습을 반영할 수 있는 삶을 창조해야 한다. 이것이 단순한 삶의 의미라고 저자는 말한다. 단순하게 사는 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했다, 그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내적인 평화와 성취감으로 충만한 삶을 창조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거다.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경험담을 틈틈이 공유할 생각이다.
우리는 대단한 무언가가 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버린다. 하지만 수많은 현자들은 사소하고 평범해도 인생은 이미 완전하며, 충분히 완벽하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체, 스피노자, 톨스토이, 체호프 등 현자들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중용의 ‘평범한 삶’을 가치 높게 평가했다.
'평범하여 찬란한 삶'이란, 헛된 야망의 실현이나 비겁한 타협이 아니라 타인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자 하는 바람이며, 떠들썩한 성공 뒤에 숨어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려는 의지다. 그리하여 낮은 곳에서도 크게 배우고, 보잘것없는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절망에서도 희망을 보는 것이다. 오늘 아침 민들레의 홀씨처럼,
[사진=박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