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최용기] 호머 헐버트 박사의 한글 사랑 /
최용기(국어학자/문학박사)
한글 때문에 조선은 발전할 것이다. 호머 헐버트 박사는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한국사, 세종 편)라고 한 인물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낯선 이름이다. ‘조선의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조선인이 이를 알지 못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한가?’ (사민필지 머리말)
헐버트 박사의 한글 사랑은 매우 특별하였다. 그는 1886년 7월 5일에 내한하여 4일 만에 한글을 읽고 썼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그가 조선의 말글을 그토록 빨리 배우고자 노력한 것은 조선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먼저 조선말을 잘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한글을 배운 지 1주일 만에 조선인들이 우수한 한글을 무시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개탄하였다. 또한, 2개월 뒤에 육영공원 개교에서 출석을 조선말로 불렀으며 내한한 지 5개월 만에 조선말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1889년에 <뉴욕 트리뷴, New York Tribune> 기고문에 한글 자모의 단순성에 감동하였음을 밝혔다. 이 글은 한글 자모를 국제 사회에 처음 소개한 글로, 자모가 단순하므로 누구나 쉽게 구별할 수 있고 어려운 글자가 없으므로 쉽게 쓸 수 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그는 조선에는 한글로 쓰인 교과서가 없는 것을 알고 한글로 책을 펴내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3년 만인 1889년에 <사민필지> 원고 작성을 시작하여 1890년에 완성하고 일본 요코하마의 출판사에서 인쇄하였다. <사민필지>는 1891년에 한글로 출간된 최초 세계 지리 교과서이며 천문, 지리, 각국 정부 형태, 사회 제도, 풍속, 산업, 교육 등을 담은 책이다. 그가 책 이름을 <사민필지, 士民必知>라고 한 것은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이다.
그는 1891년 말에 미국으로 귀환하면서 <조선 소식, The Korean Repository> 창간호(1892.1)의 첫 글로 <조선 글자, The Korean Alphabet>을 2회에 걸쳐 발표하였다. 이 글은 한글의 기원과 문자적 우수성, 세종대왕의 위대성을 국제 사회에 소개한 최초의 학술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세종의 근검 정신, 애민 정신, 법치 정신이 한글을 창제하도록 하였고, 한글은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독창적인 문자로 창제되었다고 하였다. 아울러 이 논문에서 만주 문자, 티베트 문자, 산스크리트 문자 등과 비교하여 한글의 기원을 탐구하였고 세종대왕의 위대성을 입증하기도 하였다.
우리말과 한글을 가장 체계적으로 연구한 주시경 선생도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헐버트 박사와 사제 간으로 만났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한글을 공통의 관심사로 만들어 갔으며, 한글 시대를 예고한 <독립신문> 창간을 계기로 주시경 선생이 편집과 교정을 맡았다. 헐버트 박사의 회고록에서 서재필 박사에게 주시경 선생을 추천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1895년에 <한민족의 기원, Origin of the Korean People>이라는 논문을 <조선 소식>에 발표하여 한민족의 인종적 뿌리를 추적했고, 한국어의 뿌리는 인도 남부 지방의 드라비다어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 소식> 1895년 6월호와 8월호에 <조선어 로마자 표기>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2000년에 개정한 현재 표기 방식과도 유사하다.
헐버트 박사의 한글 사랑은 1896년에 창간한 <독립신문> 한글판에서 모두를 놀라게 하였는데 그것이 한글 띄어쓰기와 점 찍기(문장 부호 일부)의 도입이다. 그는 서재필 박사에게 한글 띄어쓰기를 제안하였고, <독립신문>에서 이를 실천한 것이다. 같은 해 <조선 소식> 6월호에 <조선 글자, The korean Alphabet>을 발표하여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의 위대함을 알렸다.
그는 <조선 소식> 1896년 10월호에 “영국인들이 라틴어를 버린 것처럼, 조선인들도 결국 한자를 버릴 것이다.”라고 하여 이미 130여 년 전에 한글 전용 시대를 예언하였다. 이어서 1899년에 저명한 미국 학술지 <하퍼스, Harper’s New Monthly Magazine>에 기고한 <한국의 발명품, Korean Inventions>라는 논문에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고 필요에 대한 인식은 발명의 아버지라고 하며, 한민족의 뛰어난 재능과 정신적 강인함이 세계 최초의 발명품으로 이동식 금속활자(movable metal type), 거북선(tortoise war-ship), 현수교(suspension bridge), 폭발탄(bomb and mortar)을 만들었고, 한글은 최초는 아니지만 소리글자로서 세계 문화사를 가장 빛낸 조선의 발명품이라고 소개하였다.
아울러 한국어 어원을 최초로 탐구하여 <한국어 어원 연구, Korean Etymology>라는 논문을 <한국 평론, The Korea Review> 1901년 6월호에 발표하였다. 그는 “한국어는 교착어이고 동사의 어형 변화가 심하며, 한국어 전체 단어의 3분의 2는 동사 어간의 추적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예시로 ‘사람’은 ‘산다’에서 왔고, ‘봄’은 ‘보다’에서 왔다고 하였다. 이어서 1902년 10월호 <한국 평론>의 <한국어, The Korean Language>라는 논문에서 “한국어 연설은 끝에 오는 동사에서 절정에 이른다. 한국어는 서양 언어들보다 웅변에 더 적합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어는 대중 연설 언어로써 영어보다 우수하다.”라고 한국어에 방점을 찍었다. 이 논문은 미국의 스미스소니언협회(Smithsonian Institution) 1903년 연례 보고서(Annual Report) 학술 분야에도 게재하였다.
호머 헐버트 박사는 1903년에 <한국 평론> 4월과 5월호에 <훈민정음, The Hun-min Chong-eum>이라는 글에서 훈민정음 서문을 역사상 최초로 영어로 옮기고 학술적으로 고찰하였다. 특히, 한글 자모를 일일이 분석하고 알파벳 자모와 비교하였다. 그는 원래의 훈민정음 스물여덟 글자에서 없어진 반치음(△)이 ‘ㄴ’과 가까웠으며, 결국 ‘ㄴ’으로 대체되었다고 고찰하였다. 그 밖에 그는 한글 맞춤법 정비를 <한글 맞춤법 개정>이라는 논문을 <한국 평론> 1904년 9월호에 발표하였고, <한국 교육의 당면 과제>라는 논문을 <한국 평론> 1904년 10월호에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상충 계급과 하층 계급 사이의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글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무엇보다 한글 사랑의 명언은 헐버트 박사의 명저 <한국사, The history of korea> ‘세종’ 편에서 “문자의 단순성과 발성의 힘에서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라고 그의 뜨거운 한글 사랑을 역설하였다. 이렇듯 그는 한글의 가치를 ‘교육, 평등, 미래’로 승화시킨 진정한 한글 연구가이자 사상가라고 할 것이다.
이미 130여 년 전에 호머 헐버트 박사가 그토록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극찬한 한글은 이제 한민족의 문자를 뛰어넘어 세계인의 문자로 발돋움하고 있다. 특히, 정보화와 디지털 시대에는 한글이 더욱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광복 이후에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한 세대 만에 세계 경제 대국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 큰 역할을 하였고, 한국 전쟁 전후에 원조받던 나라가 다른 나라에 공여해 주는 나라가 된 것도 바로 한글의 힘 때문일 것이다.
한국 정부는 호머 헐버트 박사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태극장, 1950년)과 금관문화훈장(2014년)을 추서하였고,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 <헐버트의 꿈 조선을 피어나리, 김동진 지음>을 대상으로 독후감 공모전을 매년 실시하고 있다. 우리는 절대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필자 소개 <최용기 이사장>
문학박사, 국립국어원 국어진흥부장(고위공무원) 역임, 이중언어학회 부회장, 몽골민족대학교 부총장, 선문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코리안드림문학회 부회장, (사)해외동포책보내기운동협의회 이사장, (사)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공동대표, 짚신문학회 부회장. 세종대왕 생가 복원을 꿈꾸는 사람들 공동대표
*** <독후감 공모전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