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식 편집인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흥식 칼럼] 관계와 과정, 그리고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들

양자역학, 불교, 그리고 화이트헤드 ... 실재를 묻는 또 하나의 길

우리는 매 순간 단단한 세상 위에 서 있다고 믿는다.

벽은 벽이고, 돌은 돌이고, 사람은 사람이라 여긴다. 고전역학은 이 믿음을 지탱하는 든든한 언어였다. 모든 것은 분해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하지만 양자역학은 그 바닥을 흔들어 깨운다.

전자는 궤도를 그리며 돈다는 상상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에도 없고, 동시에 어디에나 있다.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순간, 우리는 이미 파동함수를 붕괴시키고 있다. 우리는 관찰자로서 세계에 개입하며, 개입하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현실은 하나로 결정된다.

이것은 물질관의 해체이자 관측자의 귀환이다. 실체의 허상은 사라지고, 확률과 관계가 남는다. 물질보다 관측자가 중요해지고, 관계는 고정된 실체를 대신한다.

동양의 사상, 그중에서도 불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진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다. 인연(因緣)이 없으면 아무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나’조차도 단단한 개체가 아니라 순간순간 관계와 경험이 빚어낸 하나의 사건이다.
무상(無常)은 변화의 다른 이름이고, 무아(無我)는 관계의 다른 표현이다. 실체를 붙잡지 않고 흐름과 인연 속에서만 존재를 이해하는 것. 이는 무심한 철학이 아니라, 실존의 태도다.

화이트헤드는 이 사유를 서양 철학의 언어로 옮겼다. 그는 뉴턴적 실체론의 폐허 위에 사건과 과정의 우주론을 세웠다. 실재는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실제적 사건(Actual Occasion)’이다. 사건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조직하고, 다시 관계망을 만들어낸다. 이를 그는 ‘포섭(Prehension)’이라 불렀다. 이 관계망이 바로 유기체적 세계관의 바탕이다.

양자역학의 얽힘과 중첩, 파동함수의 확률적 흐름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적 사유와 기묘하게 어깨를 나란히 한다. 물질은 결국 관계이며, 관계는 또 다른 사건으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유의 언어로 이 세계를 이해해야 할까?

양자역학은 기술의 차원을 넘어 이제 ‘세계관’을 흔든다. 얽힘은 첨단 암호와 양자컴퓨터의 소재이자, 동시에 철학의 재료다. 세계를 ‘조립 가능한 물질’로만 보던 태도가 흔들리고 있다. 대신 우리는 관계, 흐름, 과정, 그리고 관찰자의 책임을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물음 앞에서 선택해야 한다. 아직도 물질의 견고함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관계와 과정으로 열리는 낯선 문을 두드려볼 것인가.

이제는 철학자와 과학자만의 물음이 아니다.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한 네트워크로 얽혀 있다. 기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힘으로 돌아간다. 빛보다 빠르게 정보를 주고받고, 사람과 기계가 실시간으로 얽힌다. 이때 양자역학이 들려주는 ‘확률적 실재’는 과학실험실을 떠나 삶의 태도로 확장된다.

화이트헤드가 말했던 것처럼, 세계는 살아 있는 유기체다. 불교가 오래전부터 일러준 것처럼, 모든 것은 관계다. 양자역학은 이것을 실험실 안에서 수학으로, 실험으로 증명해낸다.

이 세 흐름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와도 맞닿아 있다. 얽힘과 중첩은 양자컴퓨터와 암호 기술로 현실이 됐다. 사회는 복잡한 네트워크로 얽혔고, 기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힘으로 돌아간다. 물질의 견고함이 아니라 관계의 역동성이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

양자역학은 과학의 언어로 실재를 다시 묻는다.

불교는 관계의 언어로 존재를 새롭게 읽어낸다. 화이트헤드는 철학의 언어로 그것을 서양 사유에 다시 심었다. 이 공명은 우연이 아니다. 세계는 더 이상 고정되지 않고, 우리 역시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과학과 철학과 오래된 지혜가 함께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낯선 길목에서 묻는다. 나란 누구이며, 무엇과 얽혀 있고, 무엇을 만들어갈 것인가. 양자역학은 실체의 끝에서 관계의 시작을 부른다. 이제 우리 몫은 그 관계의 문턱에서 다시 사유하는 일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사유를 다시 연결해 묻는 일이다.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무엇을 만들고, 무엇과 연결될 것인가.
양자역학은 실체의 끝에서, 다시 인간을 부른다. 관계와 과정의 문턱에서, 우리의 사유가 또 한 번 자라나길 바란다.